죄목조차 모호한 ‘박나래 수사’…경찰 내부서도 “각하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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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05.10. 오후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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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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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쟁점은 문제의 영상 ‘음란물’ 여부
판례상 음란물 분류될 가능성 거의 없어
‘남혐’ 논란 의식한 경찰 과잉수사 목소리
사진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경찰이 유튜브 예능에서 남자 인형을 이용해 성적 묘사를 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한 방송인 박나래씨 ‘사건’을 열흘째 수사하고 있다. 이러자 경찰 내부에서도 “법 위반 가능성이 없다면 원칙대로 각하(수사 필요성 없어 사건 종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남혐’ 논란을 의식해 처벌 가능성이 낮은 사건에 대한 판단을 미루는 것 자체가 과잉수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서울강북경찰서는 지난달 30일 박씨를 정보통신망법 위반(불법정보유통 등) 혐의로 수사해달라는 고발장을 국민신문고를 통해 접수했다. 이후 고발인 조사까지 마친 경찰은 웹예능 ’헤이나래’에 업로드되었던 영상을 분석한 뒤 박씨에 대한 피고발인 조사 여부 등을 검토 중이다. 해당 영상에는 박씨가 남성 인형인 ‘암스트롱맨’의 옷을 갈아입히며 인형의 팔을 사타구니 쪽으로 가져가 성기 모양을 만드는 장면이 포함됐다.

대법원 “저속한 느낌 넘어 존엄성 훼손해야 음란물”




박씨의 처벌 가능성을 따져보려면 문제의 유튜브 영상이 음란정보에 해당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정보통신망법은 ‘정보통신망을 통해 음란한 음향·영상을 배포하거나 공공연하게 전시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대법원은 2008년 3월 판결(2006도3558)에서 ‘음란’을 가르는 기준을 크게 세 가지로 규정했다. △정상적 성적인 수치심을 해하여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 △단순히 저속한 느낌을 넘어 사람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평가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성적 부위나 행위를 표현한 것 △사회통념에 비춰 지배적으로 성적 흥미에만 호소하고 어떠한 예술적 가치 등을 지니지 않은 것.

손지원 변호사(사단법인 오픈넷)는 “대법원 판례는 이 요건 하나하나에 모두 부합해야 불법음란물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거나 저속하다는 수준을 넘어서, 성인들도 접해서는 안 될 정도로 해악이 중대한 경우에 불법음란물에 해당한다는 취지”라고 말했다.

다만 해당 기준이 다소 추상적이기 때문에 통상 법원에서는 ‘성기 노출 여부’를 음란물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볼 때가 많다고 한다. 손 변호사는 “음란물의 개념 자체가 모호하다 보니, 보통은 성기 노출 여부나 삽입 장면이 묘사되어야 음란물로 본다. 판례상으로 박나래씨가 방송에 표현한 정도의 내용이 음란물로 분류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했다.

일각에서 박씨에게 적용할 다른 죄목으로 거론하는 성폭력처벌법상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행위나,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 등도 박씨가 출연한 영상이 애초에 음란정보에 해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므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견해다. 해당 영상이 도덕적으로 부적절할 수는 있으나 형사처벌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경찰이 죄목조차 불분명한 상황에서 박씨를 향한 일부 성난 여론을 의식해 수사를 무리하게 이어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코미디언 박나래씨가 지난 3월26일 인스타그램을 통해 '헤이나래' 영상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사과했다. 박나래 인스타그램 게시물 갈무리


경찰 내부서도 “각하 사유 명백한데 수사 진행하면 과잉수사”




경찰 내부에서도 이번 고발은 원칙적인 절차에 따라 각하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경찰수사규칙은 ‘고발인의 진술이나 고발장에 따라 피의사실이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 것이 명백한 경우’ 사건을 자체적으로 종결(각하)하도록 하고 있다.

경찰젠더연구회 회원인 이은애 총경(경기 양평경찰서장)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각하사유가 명백한데 수사를 진행하면 결과적으로 과잉수사가 된다. 젠더갈등이 집합된 문제인 만큼 엄격하게 법리만 따져서 원칙적인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법 위반 죄목조차 불분명한 상황에서 형사사건 절차를 진행하는 것 자체가 박씨에게 부당한 낙인을 찍는 과잉수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특히 수사권을 가진 경찰이 일단 고발인, 피고발인 조사부터 진행하는 것은 소수 강경 목소리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 이은애 총경은 “이번 사건에서 절차상 피고발인 조사는 필수적이지 않다. 박씨에 대한 조사는 ‘여성은 함부로 발언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했다. 손 변호사는 “사회적 해악이 중대하거나 명백한 사안도 아닌데 이 정도의 표현 행위를 가지고 누군가를 소환해 조사한다면, 앞으로 방송에서 법 위반이라고 보기 어려운 행위로 일반 시청자들이 고소·고발을 하고, 경찰은 죄가 있는 것처럼 수사하는 관행이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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