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

간양록(강항)

청담(靑潭) 2018. 9. 15. 22:29



간양록(看羊錄)

강항(姜沆 : 1567-1618)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 영광 출신.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오복(姜五福), 아버지는 강극검(姜克儉), 어머니는 통덕랑(通德郞) 김효손(金孝孫)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가주서를 거쳐 1595년 교서관박사가 되고, 1596년 공조좌랑과 이어 형조좌랑을 역임했다.

1597년 고향에 내려와 있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분호조참판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았다.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져 남원이 함락당하자 고향으로 내려와 순찰사 종사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인을 모았다.

영광이 함락되자 가족들을 거느리고 해로로 탈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 오쓰성[大津城]에 유폐되고 말았다. 이곳에서 출석사(出石寺)의 중 요시히도[好仁]와 친교를 맺고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에 수록,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1598년 오사카[大阪]를 거쳐 교토[京都]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후지와라[藤原惺窩]·아카마쓰[赤松廣通] 등과 교유하며 그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주었다.

특히, 후지와라는 두뇌가 총명하고 고문(古文)을 다룰 줄 알아 우리 나라의 과거 절차 및 춘추석전(春秋釋奠)·경연조저(經筵朝著)·공자묘(孔子廟) 등을 묻기도 하고, 또 상례·제례·복제 등을 배워 그대로 실행, 뒤에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일본 억류 중 두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또한 그들의 노력으로 1600년에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귀국할 수 있었다.

1602년 대구교수(大邱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곧 사직했으며, 1608년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일본 억류 중 사서오경의 화훈본(和訓本) 간행에 참여해 몸소 발문을 썼고, 『곡례전경(曲禮全經)』·『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근사속록(近思續錄)』·『근사별록(近思別錄)』·『통서(通書)』·『정몽(正蒙)』 등 16종을 수록한 『강항휘초(姜沆彙抄)』를 남겼으며, 이들은 모두 일본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그밖에 「문장달덕록(文章達德錄)」과 동양문고 소장본 『역대명의전략(歷代名醫傳略)』의 서문을 썼다. 1882년(고종 19)에 이조판서양관대제학(吏曹判書兩館大提學)이 추증되었다.

영광의 용계사(龍溪祠)·내산서원(內山書院)에 제향되고, 일본의 효고현[兵庫縣]에 있는 류노[龍野]성주아카마쓰[赤松廣通]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저서로는 『운제록(雲堤錄)』·『강감회요(綱鑑會要)』·『좌씨정화(左氏精華)』·『간양록(看羊錄)』·『문선찬주(文選纂註)』·『수은집(睡隱集)』 등이 있다.



1. 적중 봉소(賊中封疏)

▣적중 봉소(賊中封疏)

선무랑(宣務郞) 전 수형조좌랑(守刑曹佐郞) 신(臣) 강항(姜沆)은 목욕재계하고 백 번 절하여 서(西)로 향해 통곡하면서, 삼가 정륜입극 성덕 홍렬대왕 주상 전하(正倫立極盛德弘烈大王主上殿下)께 상언(上言)하옵니다.

생각하옵건대, 소신(小臣)이 지난 정유년(1597, 선조 30)에 분호조(分戶曹) 참판(參判) 이광정(李光庭)의 낭청(郞廳)으로서 총병(總兵) 양호(楊鎬)의 군량 운반을 호남(湖南)에서 독려하였습니다. 군량이 수집되었으나, 적의 선봉이 이미 남원(南原)을 침범했고 광정 또한 서울에 간 상황에서 신은 순찰사(巡察使)의 종사관(從事官) 김상준(金尙寯)과 더불어 여러 고을에 격서(檄書)를 보내어 의병(義兵)을 모집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생각하는 선비로서 모인 사람이 겨우 수백 명이었을 뿐더러, 자기 가속들을 고려하고 염려해서 곧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신이 어쩔 수 없이 배에다 아비ㆍ형ㆍ아우ㆍ처자를 싣고 서해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갈 계획을 했었는데, 사공이 여의치 못하여 배를 운행하지 못하고 바닷가에서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적의 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이 벗어나지 못할 것을 깨닫고서 나머지 가속(家屬)과 함께 바닷물 속으로 떨어졌으나, 해안의 수심이 얕아 모두 왜놈들에게 잡히게 되고, 오직 신의 아비만이 혼자 다른 배를 잡아타 모면했을 뿐, 분호조(分戶曹) 곡식을 모집한 공명첩(空名帖) 수백 통이 모두 물 속에 침몰되었습니다. 직무 수행을 형편없이 하여 위로 조정을 욕되게 하였으니, 더욱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적은 신이 사족(士族)임을 알고서 신과 형ㆍ아우를 일제히 선루(船樓)에 결박하고, 배를 돌려 무안현(務安縣)의 한 바다 모퉁이로 끌고 갔습니다. 그곳에는 적선 6백, 7백 척이 두어 리(里)에 걸쳐 가득차 있었고, 우리나라 남녀가 왜놈과 더불어 거의 반반씩 되었는데 이 배 저 배에서 부르짖어 우는 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하였습니다. 순천 좌수영(順天左水營)에 당도하자, 적장(賊將) 좌도수(佐渡守)란 자가 신과 신의 형 준(濬)ㆍ환(渙)ㆍ처부(妻父) 김봉(金琫) 및 그 가속(家屬)들을 한 척의 배에 실어 왜국으로 압송하였습니다.

그 배가 순천을 떠나 일주야(一晝夜) 만에 안골포(安骨浦)에 당도하였으며, 이튿날 저물 무렵에 대마도(對馬島)에 당도하였는데 풍우를 만나 이틀간을 머물렀습니다. 또 이튿날 저물 무렵에 일기도(壹岐島)에 당도하고, 또 이튿날 저물 무렵에 비전주(肥前州)에 당도하고, 또 이튿날 저물 무렵에 장문주(長門州)의 하관(下關)에 당도하고, 또 이튿날 저물 무렵에 주방주(周防州)의 상관(上關)에 당도하였는데, 이른바 적간관(赤間關)이라는 곳이었습니다. 또 이튿날 저물 무렵에 이예주(伊豫州)의 대진현(大津縣)에 당도하여 드디어 유치되었는데, 좌도(佐渡)란 자의 사읍(私邑) 세 성(城) 중에 대진이 그 하나였습니다.

이곳에 당도해 보니 우리나라 남자와 여자로 전후에 사로잡혀 온 사람이 무려 천여 명인데, 새로 붙잡혀 온 사람은 밤낮으로 마을 거리에서 떼지어 울고 있으며, 먼저 온 사람은 반쯤 왜 사람에 귀화하여 돌아갈 생각이 이미 없어져 버렸습니다. 신이 넌지시 탈출하여 서쪽으로 달아나자고 깨우쳐 보았으나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듬해 4월 그믐에, 서울 죽사(竹肆)에서 살다가 임진년에 사로잡혀 온 사람이 왜의 서울로부터 이예주(伊豫州)로 도망해 왔는데, 왜말을 잘하기에 신이 서쪽으로 돌아갈 뜻을 비쳤더니, 그 사람이 드디어 함께 계획을 정했습니다. 대개 신이 왜말을 전혀 몰라서 통역을 대동하지 아니하면 촌보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5월 25일에 밤을 틈타 서쪽으로 탈출하여 사흘을 가다가 몰래 바닷가 대밭 속에서 쉬고 있노라니, 나이 60 남짓 되어 보이는 왜승(倭僧) 하나가 폭포에서 몸을 씻고 바윗돌에서 졸고 있었습니다. 통역이, 가만히 신등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내막을 고하자 그 중이 슬피 여기며 몇 번을 탄식하더니 신 등을 풍후(豐後)까지 배로 건너 주겠다고 허락하였습니다. 신 등이 반가워 중을 따라 내려오기를 채 10보(步)도 못하여 문득 좌도(佐渡)의 부곡(部曲) 도병(道兵)이란 자를 만났는데, 왜졸(倭卒)을 거느리고 갑자기 왔으니, 신이 도망자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대진성(大津城)으로 강제 송환되었는데, 이후부터는 단속이 더욱 엄하였습니다.

금산(金山) 출석사(出石寺)의 중 호인(好仁)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자못 문자(文字)를 해독하였습니다. 신을 보고 슬프게 여겨 예우가 남보다 더했으며, 따라서 신에게 그 나라 제판(題判 관청에서 백성이 올린 소장(訴狀)에 쓰는 판결)을 보여 주었는데, 방여(方輿)와 직관(職官)을 빠짐없이 다 기록한 것이기에 신이 곧 등사하였습니다. 또 좌도의 아비 백운(白雲)이 매우 상세한 그 나라 여도(輿圖)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듣고 통역을 시켜 모사해 내고, 다시 눈으로 본 현실의 형세를 우리나라의 방어책과 비교해 보았으며, 간혹 어리석은 신(臣)의 천에 하나나 맞을는지 모르는 생각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그 사이에 논하여 보기도 하였습니다.

아아, 전투에 실패한 장수도 오히려 용맹을 말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신은 사로잡혀 적의 소굴에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처지로서, 문득 감히 붓대를 놀려 조정 정책의 득실을 논한다는 것은 극히 참람한 일로서 죄를 면할 길이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옛사람은 시간(尸諫)을 한 사람도 있고, 죽음에 임박해서도 계책을 올릴 것을 잊지 아니한 사람도 있으니, 진실로 국가에 조금이라도 이익될 일이 있다면 또한 죄인이라 하여 끝내 말하지 않는 것도 불가하옵니다.

...왜적이 그 해 8월 8일에 신등을 옮기어 9월 11일에 대판성(大坂城)에 당도하였는데, 적의 괴수 수길(秀吉)은 이미 7월 17일에 죽었습니다. 대판은 왜의 서경(西京)인데, 거기에 있은 지 수일 만에 또 신등을 복견성(伏見城)으로 옮겼습니다. 복견성은 왜의 새 수도였습니다. 적괴(賊魁)가 죽고 나자 왜노들의 상황이 예전과는 아주 달라졌는데, 신은 우리 조정의 조치와 계획이 혹시라도 이러한 기회를 잃을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로잡혀온 사인(士人)으로 왜경(倭京)에 있는 동래(東萊) 김우정(金禹鼎)ㆍ진주(晉州) 강사준(姜士俊) 등과 더불어 아침 저녁의 양식을 조금씩 모아 각기 은화(銀貨) 1전과 바꾸고, 인하여 외국인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왜말을 잘하는 통역을 선택하여, 노비(路費)와 뱃삯을 대주어 강역(疆域)의 밖에 도달하게 했었는데, 편지가 미처 발송되기 전에 뭇 왜인들이 이미 철수하였습니다.

신이 갖가지 계획으로 돌아갈 것을 도모하였으나 수중에 돈 한 푼이 없기에 마지못해 왜승에게 글씨품을 팔아 은전(銀錢) 50여 개를 얻었습니다. 몰래 배 한 척을 사서 동래 김우정과 서울 사람 신덕기(申德驥), 진주(晉州) 사람인 사공 정연수(鄭連守) 등과 함께 서쪽으로 돌아갈 것을 꾀하였습니다. 신(臣)과 신의 형 환(渙), 처부(妻父) 김봉(金琫) 등은 미처 기동하지 못하고, 신의 형 준(濬)이 사공과 통역을 거느리고 이미 배 타는 장소로 갔는데, 바닷가의 왜인이 몰래 좌도(佐渡)의 집에 고발하였습니다. 그래서 왜적이 군졸을 풀어 수색 체포하여 20여 일을 감금하였는데, 통역들은 다 죽었고 그 나머지는 오랜만에야 풀려났습니다.

아아, 계책도 막히고 재간도 고갈되어 천만가지 생각과 온갖 계획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신의 변변찮은 임금을 향한 정성이 천지를 감동시키지 못하여 이런 오만가지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아아! ‘멀리 남의 나라에 의탁되어 있는 것을 옛사람도 슬퍼했다.’는 것은 참으로 형식적인 말에 불과합니다. 이 목숨이 남아 있는 동안에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다시 보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으나, 살아서 대마도(對馬島)를 지나 부산(釜山)을 한 치만이라도 바라보게 된다면, 아침에 갔다 저녁에 죽더라도 다시 털끝만큼의 여한이 없겠사옵니다.

그 왜정(倭情)에 대한 기록과 적괴(賊魁)가 죽은 뒤의 간위(奸僞)를 기록하여 올리려 했던 것을 아래와 같이 아울러 기록하오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소신(小臣)의 구차히 살고 있는 것 때문에 아울러 그 말까지 버리지 마소서. 양(陽)이 열리고 음이 폐색되며 우레가 진동하고 바람 날 듯이 정사를 보실 적에, 간간이 이 글을 펼쳐 보신다면 절충(折衝)하고 어모(禦侮)하는 정책에 있어 다소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시험 삼아 정신들여 잘 살펴보소서. 신은 지극히 황공하고 애통하며 절박함을 견디지 못하오며, 삼가 소(疏)를 올려 아룁니다.

만력(萬曆) 27년(1599, 선조 32) 4월 10일


▣왜국 팔도 육십육주도(倭國八道六十六州圖)

이순신(李舜臣)은 수로(水路)의 장성(長城)입니다. 죄상이 나타나지도 아니했는데 마침내 이옥(吏獄)에 잡아넣고, 원균(元均)으로 그 임무를 대행하게 하였으니, 불가합니다. 임진년에 사로잡혀 갔다가 적을 따라 침략해 들어갔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정유년 7월 15일에 왜장이 날쌘 군졸을 모집하여 경쾌한 배를 타고 우리 군사의 동정과 우리나라 병선(兵船)을 정찰하였다. 우리 병선의 군사들이 잠에 취하여 코를 골고 있으므로 적도(賊徒)가 급작스럽게 포(砲) 두 발을 발사하였다. 우리 군사가 다투어 닻줄을 끊으며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자, 적도가 달려가 병선을 끌고 와 일시에 진격하는 바람에 한산도(閑山島)가 마침내 무너졌다. 급기야 여러 왜장이 서해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 전라도우수영(全羅道右水營)에 당도하였는데, 이순신이 과선(戈船) 십여 척을 이끌고 힘껏 싸워 물리쳤다. 왜장 내도수(來島守)가 패전하여 죽고, 민부 대부(民部大夫)는 바다에 떨어져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그 나머지 작은 장수도 죽은 사람이 여러 사람이었다.”

하였습니다. 이 말로써 관찰하오면, 원균의 작전이 형편없었던 것과 순신이 적은 수를 가지고 많은 수를 당해낸 것을 대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한산도가 이미 격파되고 적병이 이미 호남(湖南)을 범했는데, 순사(巡使) 박홍로(朴弘老)를 비로소 논체(論遞)하고, 새 순사(巡使) 황신(黃愼)을 비로소 길 떠나 보냈으니, 불가합니다. 홍로는 이미 해임(解任)되고 황신은 임지에 당도하지 못하여, 영문(營門)이 한 번 흩어지자 수습할 도리가 없어, 53 고을이 한 곳도 군사를 모아 둔 데가 없고, 적병이 사방으로 흩어져 횡행하기를 아무도 없는 지경에 들어간 듯이 하였습니다. 병란이 일어난 이래 팔도에서 피해가 호남보다 심한 데가 없었던 것은 진실로 한 도의 주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산도가 격파되고 적병이 이미 남원(南原)을 포위하였는데, 오응태(吳應台)가 비로소 전라 방어사(全羅防禦使)가 되고, 김경로(金敬老)가 비로소 전라 조방장(全羅助防將)이 되었으니, 불가합니다. 신이 그때에 담양부(潭陽府)에 있으면서 눈으로 본 일이온데, 경로 등이 비로소 명(命)을 받았으나 수하(手下)에 졸병 하나가 없었고, 적의 기세가 또한 급하여 징모(徵募)할 겨를도 없었으므로 단기(單騎)로 쏘다니며 편비(褊裨) 두 사람을 순찰사에게 빌려 복병(伏兵)이 있는 장소로 곧장 갔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당한다면 비록 곽자의(郭子儀)로 하여금 감당하게 할지라도 역시 어찌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우리나라가 평상시에도 영남(嶺南)의 전세(田稅)를 태반이나 동래(東萊)ㆍ부산(釜山)에 수송하여 왜사(倭使)가 내왕할 적에 쓰는 비용에 충당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포로가 되어 왜의 땅에 와서 왜승에게 자세히 들어 보니, 평상시에 있었던 이른바 왜사(倭使)란 것이 모두 대마도주(對馬島主)가 보낸 사인(私人)이요, 이른바 왜의 국서(國書)라는 것도 모두 대마도주가 지어 보낸 위서(僞書)로서, 비단 모든 왜들이 전혀 모르는 사실일 뿐 아니라, 비록 일기(壹崎)ㆍ비전(肥前) 등 여러 왜장(倭將)들까지도 역시 들어보지 못한 일이라 합니다. 대마도에는 수전(水田)이 한 이랑도 없는 까닭에 우리나라를 속여서 그 쌀을 받아다가 공사(公私)의 비용을 충당한 것입니다. 김성일(金誠一) 등이 왔을 적에 왜승이 이 사실을 우리나라 역관에게 듣고서, 그 거짓된 실상을 말하려고 하자 대마도 통역이 정상이 탄로될까 두려워하여 즉시 왜승을 몰아냈다고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된 발단도 모두 의지(義智)의 꾀에서 나왔답니다. 섭진수(攝津守) 행장(行長)이 의지의 처부(妻父)입니다. 의지가 능히 제 힘으로는 적괴에게 통할 수 없으므로 행장을 통하여 우리나라 허실(虛實)을 자세히 고하였습니다. 행장이란 자가 적괴에게 자신이 그 일을 맡은 것을 청하여, 병화(兵禍)가 연속되고 죽은 사람이 상당히 많으므로 비록 왜인들일지라도 원망이 뼈에 사무쳐 말하기를,

“섭진수가 실로 이 일을 만들었다.”

고 하며, 비록 청정(淸正)같이 사나운 자로도 역시 말하기를,

“조선과 전쟁을 일으킨 자는 섭진수이다.”

고 하였답니다.

행장은 우리나라와의 전쟁이 끝날 기약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하루 아침에 철병하여 돌아가게 되면 우리나라에서 의지를 성토할 것이고, 또 호시(互市 교역)와 왕래(往來)도 허락하지 않게 될 것을 염려하여 부러 힘껏 화해를 주장한 것이니, 실은 의지의 처지를 위한 것입니다.

아아! 한 도의 백성의 고혈(膏血)을 다 뽑아내어 일개 조무래기 추한 놈의 야욕을 채워주었고, 결국은 이토록 많은 속임을 당하였으니, 어찌 상공(上供)하는 전세(田稅)를 감하여 변장의 용도에 충당하는 것만 같겠습니까?

...이상 봉소(封疏)는 전후의 것이 모두 3본(本)으로 무술년에 이예주(伊豫州)에 있을 적에 김석복에게 봉부(封付)한 것이 1본이요, 기해년에 복견성에 있을 적에 왕건공에게 봉부한 것이 1본이요, 다시 써서 신정남에게 봉부한 것이 1본이다. 신정남의 것은 전달되지 못했고, 왕건공이 가지고 온 본이 유일하게 조정에 주달되었는데, 상께서 깊이 탄상(嘆賞)한 나머지 소장을 비변사(備邊司)에 내렸다. 김석복은 신축년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오게 되어, 체찰사(體察使) 이덕형(李德馨)에게 바쳤었는데, 이덕형이

“강(姜)이 이미 살아 돌아왔으니, 이 소는 올릴 필요가 없다.”

하고 돌려 주었다 한다.



2. 록(錄)

▣적중 문견록(賊中聞見錄)

■제왕((帝王) 천자(天子)

바로 왜의 황제인데, 머리를 자르지도 않고 당(堂)에 내려가지도 않으며, 보름 전에는 채소를 먹고 보름 후에는 생선을 먹으며, 전세(前世)에 있어서는 위복(威福)을 그 자신이 행사했고, 섭정(攝政)ㆍ관백(關白)ㆍ대납언(大納言) 등의 관을 두어 임금의 일을 섭행(攝行)하게 하였습니다. 중세 이후로는 섭정이 국가의 명령을 독차지하고, 이른바 천황이란 것은 호령을 내리지 못하였으며, 왕성(王城)에 봉행(奉行)한 사람을 두어 왕성의 안팎을 경호하게 하였습니다. 수길(秀吉)의 세상에는 덕선원(德善院)의 현이(玄以)란 자가 왕경(王京)의 봉행이 되었으니, 봉행이란 것은 맡아 지킨다는 칭호입니다.

▣임진ㆍ정유에 침략해 왔던 모든 왜장의 수효

가강(家康 1543-1626)이라는 사람은 관동(關東)의 대수(大帥)이다. 지금 내부 등원(內府藤原)이라 칭하는데, 원의정(源義定)의 11대 손자다. 의정이 일찍이 관백(關白)의 직을 맡았으므로 그 자손들이 관동에 대대로 사는데, 그의 식읍(食邑)이 8주(州)에 걸쳐 있다. 그 사람됨이 날쌔고 사나워 싸움을 잘하는 까닭에 온 나라 사람이 감히 그 서슬에 맞서지 못했다. 가강의 때에 와서 수길이 비로소 신장(信長)을 대신하였는데, 가강이 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수길이 직접 가서 쳤다. 가강이 정병 1만 8천 명을 거느리고 상모(相模)에서 싸워 수길의 군사가 패하자, 드디어 더불어 화친을 맺었고, 가강 역시 원망을 풀고 복종하여 몸이 마치도록 신하의 예절을 잃지 아니하였다. 그 맏아들 삼하수(三河守)는 지혜 있고 용맹스러워 가강보다 나은데도, 가강은 그 차자(次子) 강호 중납언(江戶中納言)을 사랑하여 자기 후계자를 만들려고 했다. 그 작은 아들은 일기수(壹岐守)인데, 나이가 겨우 10세라고 한다. 가강의 나이 현재 63세다. 토지의 소산은 2백 50만 석이라 하는데, 실지는 그 배나 된다.

○적괴 수길은 미장주(尾張州) 중촌향(中村鄕) 사람이다. 가정(嘉靖) 병신년(1536, 중종 31)에 태어났는데, 얼굴이 못생기고 키도 작으며 형상은 원숭이와 같으므로, 드디어 원숭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낳자 오른손이 여섯 손가락이었다. 장성하여 말하기를, ‘남들은 모두 손가락이 다섯인데, 여섯 손가락을 어디다 쓸 것인가.’ 하며, 스스로 칼로 잘라 버렸다. 아비의 집이 본래 빈한하여 어떤 농가의 더부살이가 되어 꼴도 베고 나무도 베는 것으로 생활하였었는데, 장년기가 되자 스스로 분발하여 전 관백(關白) 신장(信長)의 종이 되었으나 별로 특이한 일이 없었다. 관동(關東)으로 도망해 달아나 수년 동안 있다가 다시 돌아와 자수(自首)하니, 신장이 그 죄를 용서하고 예전대로 하여 주었다.

수길이 작심하고 봉공(奉公)하여,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밤이나 낮이나 할 일을 그만두지 아니하였다. 신장이 매번 뭇 종들을 시켜 시중의 물건을 사오게 하면, 반드시 중한 값을 달라 하며, 값이 조금만 맞지 않으면 사오지 못했는데, 수길을 시키게 되면서는, 매번 싼 값으로써 중한 물건을 사오면서도 곧 갔다 바로 돌아오므로 신장이 대단히 기특히 여겼다. 실은 수길이 신장이 은혜롭게 대우해 주기를 노려, 매번 자기 돈으로 반절을 보탠 것인데, 뭇 종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것임. 급기야 신장이 친히 북쪽 주(州)의 배반자를 치게 되자, 수길이 창을 가지고 돌격전을 하여 닥치는 곳마다 모두 쓰러뜨리므로, 신장이 드디어 파마주(播摩州)를 떼어 그 공을 상 주었고, 그런 지 얼마 안 가서 또 축전수(筑前守)로 승진시켰다. 처음에는 그 성(姓)을 목하(木下)라 하고, 이름을 등길(藤吉)이라 했는데, 혹은 등귤(藤橘)이라고도 함. 이때에 이르러 그 성을 고쳐 우시(羽柴)라 하니, 이로 인해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라 칭하게 되었다.


3. 부인(俘人)에게 고하는 격서[告俘人檄]


4. 승정원에 나아가 계사함[詣承政院啓辭]

남자는 반드시 칼을 찬다. 이미 칼을 차면 오직 병무(兵務)와 역사(役事)를 다스릴 따름이다. 유독 승려들만은 칼을 차지 아니하는데, 그들 중에는 혹은 의술(醫術)을 배우거나, 혹은 장사를 직업으로 삼거나, 혹은 점을 치거나, 혹은 장왜(將倭)의 집에서 다실(茶室)을 청소하기도 하는데, 이 무리들은 모두 처자가 있고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으면서 시장 안에서 뒤섞여 산다. 혹은 생도(生徒)를 교수하거나, 혹은 범패(梵唄 부처의 공덕을 찬미하는 불교의식에 쓰는 노래)를 높이 외우거나, 혹 공자(孔子)를 송법(誦法)하거나, 혹은 산과 들에 방랑(放浪)하면서 화복(禍福)을 말해 주거나, 행걸(行乞)하거나 하는데, 이 무리들은 다 처자가 없고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산림(山林) 속에서 따로 살고 있다. 왜의 남자는 중이 된 자가 열에 4~5를 차지하는데, 병무와 역사에 싫증이 나서, 몸을 보존하고 해(害)를 멀리 하려는 자는 다 중이 되는 까닭이다.



5. 난리를 겪은 사적[涉亂事迹]

정유년(1597) 2월 초 8일에 나는 호조랑(戶曹郞)으로 고유장(告由狀)을 바치고 귀성(歸省)하여 유봉(流峯)의 고향 땅에서 농사를 돌보고 있었다. 5월 17일에 명(明) 나라 장수 양 총병(楊摠兵 양호(楊鎬))이 서울에서 왜적을 방어할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남쪽의 남원(南原)으로 내려갔다. 참판(參判) 이광정(李光庭)이 분호조(分戶曹)로서 전라도에 군량을 독려하는 일로 조정에 청하여서, 조정에서는 나와 삼가(三嘉)에 사는 예조 좌랑(禮曹佐郞) 윤선(尹銑)을 그 직에 보임시켰다.

나는 5월 그믐에 격문에 따라 부임하니, 이 상공(李相公 이광정을 이름)은 남원에 있으면서 지방(支放)을 감검(監檢)하고 나에게 운반을 독촉하라고 명하였다. 7월 그믐 사이에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이 한산도(閑山島)에서 패전하여 한산도가 함락을 당하였고, 8월 보름 경에 적의 군사가 이미 남원을 침범하여 포위 공격한 3일만에 양 총병은 포위망을 돌파하고 북으로 나오니, 성은 끝내 함락되었다. 나는 남의 막부(幕府)가 된 이상에는 주사(主司)의 거처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함평(咸平)에서 일주야를 달리어 순창(淳昌)에 당도하였다. 여기서 참판이 북상(北上)했다는 말을 듣고서야 마침내 본군으로 돌아와 전 군수(郡守) 순찰사 종사관(巡察使從事官)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열읍(列邑)에 격서(檄書)를 전달하여 의병을 수합하니, 나라를 염려하는 선비가 수백 명이 왔다. 그런데 적의 군사는 한 부대가 이미 노령(蘆嶺)을 넘어 연해변에는 간정(乾淨)한 땅이라고는 한 곳도 없고, 오합(烏合)의 군중은 한꺼번에 흩어졌다. 그래서 김공은 성을 나와 북으로 올라가고 나는 성을 나와 집에 당도하여, 노친(老親)을 모시고 집안 아이들을 거느리고 논잠포(論岑浦)로 나가서 배를 마련하는 중이었는데, 신임 순찰사(巡察使) 황신(黃愼) 영공(令公)이 종사(從事)로써 나를 불렀다. 육로(陸路)는 이미 길이 막혔었다.

9월 14일에 왜적은 이미 영광군(靈光郡)을 불태우고 산을 수색하고 바다를 훑어 인물(人物)을 도살(屠殺)하므로, 나는 밤 2경에 배를 탔다. 그런데 부친이 본시 배멀미를 걱정하는 처지신데, 배가 작아서 흔들리기 쉽기 때문에 계부(季父)의 배에 옮겨 모시고, 종형제는 배가 좁아서 탈 수 없으므로 마지못해 두 형수 및 구수(丘嫂 장형수)ㆍ처조부(妻祖父)ㆍ처부모(妻父母) 및 나의 처ㆍ첩(妻妾)이 함께 탄 배에 탔다. 그리고 자부(姊夫)의 부친 심안평(沈安枰)의 일가족이 궁지에 빠져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또한 함께 타자고 하고 보니, 배는 작고 사람은 많아서 배가 몹시 더디게 갔다.

15일에 두 배가 묘두(猫頭)에서 함께 자는데 피란하는 배가 모인 것이 거의 백여 척이었다.

16일에도 묘두에서 자고, 17일에는 비로초(飛露草)에서 잤다. 18일에 종형 협(浹)이 선전관(宣傳官)으로서 표신(標信)을 받들고 신통제(新統制) 이순신(李舜臣)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우수영(右水營)에서 선소(船所)로 달려왔다.

20일에 비로소 해상의 왜선 천여 척이 이미 우수영에 당도하였으므로, 통제사는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일문(一門)의 부형과 더불어 향해 갈 곳을 의논하자, 혹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자고 하고, 혹은 흑산도(黑山島)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나는 종형 홍(洪)ㆍ협(浹)과 함께 말하기를,

“배 안에 있는 장정이 두 배를 합치면 거의 40여 명에 달하니, 통제사에게 붙어서 싸우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하는 것이 설사 성공을 못하더라도 떳떳하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의논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사공 문기(文己)라는 자가 가만히 그 말을 듣고서는, 자기 자녀(子女) 네 사람이 어의도(於矣島)에 있으므로 실어올 작정을 하고서 21일 밤중에 나의 형제가 곤히 잠든 틈에 바람이 부는 틈을 타서 배 줄을 끌러 놓으니, 별안간 부친이 타고 계시는 배와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

배가 떠나서 진월도(珍月島)에 이르러, 통제(統制)의 배 10여 척이 이미 각씨도(各氏島)를 지나갔다는 말을 듣고 뱃사공을 나무라며 배를 돌려 서쪽으로 올라가게 하였으나 북풍이 너무 세게 불어 배가 올라갈 수가 없었다. 적의 기세는 이미 급박한데 부자가 서로 잃어버렸으니, 막다른 길에 의지할 것은 단지 뱃사람들뿐이어서 그 죄를 다스릴 수도 없게 되었다.

22일 부친이 탄 배가 돌아서 염소(鹽所)로 향했다는 소식을 잘못 듣고서 염소의 당두(唐頭)로 향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심안평(沈安枰)의 일가(一家)는 배가 좁아서 육지에 내리자, 창두(蒼頭) 만춘(萬春)이라는 자는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는 자인데, 물을 길어 온다고 핑계대고서 육지로 달아나 버렸다.

23일 아침 사(巳)시에 당두에서 또 논잠포(論岑浦)로 향했는데 노친이 혹시 논잠포에 계시는가 생각되어서였다. 바다 안개가 자욱한 속에 문득 황당선(荒唐船 바다 위에서 출몰하는 외국의 배) 한 척이 돌연히 날아오자 뱃사람들이 왜선이 온다고 외치므로 나는 사로잡힘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서, 옷을 벗고 물 속에 뛰어버리자, 한 집안 처자 형제와 한 배의 남녀가 거의 반 이상이 함께 물에 빠졌다. 그런데 배 매는 언덕이어서 물이 얕아, 적이 와선(臥船 폐선)의 장대로 끌어내어 일제히 포박하여 세워 놓았다. 오직 김주천(金柱天) 형제와 노비(奴婢) 10여 명이 언덕에 올라 달아나서 모면되고, 망모(亡母)ㆍ망형(亡兄)의 목주(木主 신주)는 중형이 안고 물 속에 떨어졌는데, 끌어내는 사이에 수습하지 못하였으니, 돌아가신 모친과 살아계신 부친을 섬겨보려던 뜻이 한꺼번에 다하고 말았다.

어린아이 용(龍)과 첩의 소생 딸 애생(愛生)을 모래 밭에 버려 두었는데, 조수가 밀려 떠내려가느라 우는 소리가 귀에 들리더니 한참만에야 끊어졌다. 나는 나이가 30세에 비로소 이 아이를 얻었는데, 태몽에 새끼 용이 물 위에 뜬 것을 보았으므로 드디어 이름을 용이라 지었던 것이다. 누가 그 아이가 물에 빠져 죽으리라 생각했겠는가? 부생(浮生)의 온갖 일이 미리 정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다. 왜적이 내가 타고 가던 배를 저희들 배의 꼬리에 달고 바람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는데 배가 살과 같이 빨랐다.

24일 무안현(務安縣)의 한 해곡(海曲)에 당도하니, 땅 이름은 낙두(落頭)라 하였다. 적의 배 수천 척이 항구에 가득 차서 붉은 기ㆍ흰 기가 햇볕 아래 비치고, 반수 이상이 우리나라 남녀로 서로 뒤섞여 있고, 양옆에는 어지러이 쌓인 시체가 산과 같고, 울음 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바다 조수도 역시 흐느꼈다. 무슨 마음으로 낳았으며, 무슨 죄로 죽는 것인가? 나는 평생에 뭇 사람 중에서 가장 나약하고 겁이 많은데도, 이때만은 매양 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배가 이미 중류로 떠나가자, 왜적 하나가 통역을 대동하고 와서 묻기를,

“수로(水路)의 대장이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태안(泰安) 안행량(安行梁)에 있는데, 옛 이름은 난행량(難行梁)이다. 하도(下道)의 조선(漕船)이 해마다 표류되고 난파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좋게 지어서 제압한 것인데, 대개 수로의 천험(天險)이 된다. 그러므로 명 나라 장수인 소(召)ㆍ고(顧) 두 유격(遊擊)이 과선(戈船) 만여 척을 거느리고 양(梁)의 위 아래를 가로 끊어, 유선(遊船)이 이미 군산포(群山浦)에 와 있고, 통제사(이순신을 가리킴)는 중과부적으로 물러나 명 나라 군사와 합세하고 있다.”

하자, 적의 무리는 서로 돌아보며 기가 꺾였다.

나는 가만히 통역에게, 나를 잡아가는 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이예주수(伊豫州守) 좌도(佐渡)의 부곡(部曲) 신칠랑(信七郞)이라는 자라고 했다. 밤 2경에 처부(妻父)가 몰래 묶은 줄을 풀고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 들어가자, 적의 무리는 떼를 지어 소리를 치며 즉시 끌어내었다. 이 때문에 나의 집안 식구를 더욱 단단히 얽어매서 오라줄이 살 속을 파고 들어가서 손등이 모두 갈라지고 터져서 끝내 큰 종기가 되었다. 그래서 3년을 지나도록 굽히고 펴지를 못했으며 오른손에는 흉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인하여 통역에게 묻기를,

“적이 어째서 우리들을 죽이지 아니하느냐?”

하니, 통역이 대답하기를,

“공 등이 사립(絲笠)을 쓰고 명주 옷을 입었으므로 관인(官人)이라고 생각하여 포박하여 일본에 송치하려고 하기 때문에 삼엄하게 경계하고 지키는 것이다.”

하였다.

아! 사나운 진(秦) 나라가 예(禮)를 버리자 노중련(魯仲連)은 동해(東海)에 빠져 죽기로 했고, 무왕(武王)은 포학한 자를 토벌하였는데도 백이(伯夷)는 오히려 서산(西山)에서 굶어죽었다. 하물며 이 적은 백만(百蠻)의 추한 종류요, 우리나라 신민과는 불공대천의 원수이므로, 한 순간이라도 구차히 산다는 것은 만 번 죽어도 그 죄가 오히려 가볍다 하겠는데, 몸이 얽혀 있으니 자유가 없음에야 어찌하랴.

3일이 지나자 왜적은 통역을 대동하고 와서 묻기를,

누가 바로 정처(正妻)이냐?“

하니, 부인들이 다 자수하자 왜선으로 몰아 올라가게 하고, 나의 형제를 옮겨서 실으면서 말하기를,

“장차 너희들을 죽일 것이다.”

하였다. 나의 첩ㆍ처조부 및 장형수ㆍ비자(婢子) 10명과 처부의 서제매(庶弟妹) 등을 혹은 나누어 싣기도 하고 혹은 살해하기도 했다. 슬프도다! 망형이 죽던 날에 쪽지 하나로 나에게 부탁하기를,

“네가 인간에 살아 있으니 과부된 나의 아내는 힘입을 데가 있구나!”

하였는데, 누가 갑자기 이 지경을 당할 줄이야 생각했겠는가? 삶과 죽음을 생각하니 비통하기 그지없지만, 나 역시 목숨이 어느 때까지 붙어 있을지 알 수 없는 처지였다. 노비(奴婢)들도 나를 버리고 달아난 자는 모두 목숨을 도생했고, 상전을 연연하여 차마 가지 못한 자는 모두 살해를 당했으니, 이 역시 슬픈 일일 따름이었다.

이윽고 여러 왜가 많은 배를 발동하여 남으로 내려갔는데, 행로가 영산창(榮山倉)ㆍ우수영(右水營)을 지나서 순천(順天) 왜교(倭橋)에 당도했다. 이곳에는 판축(板築)이 이미 갖추어 해안에다 성을 쌓아 위로 은하수에까지 맞닿을 정도였다. 뭇 배들은 모두 줄지어 정박해 있었는데, 유독 부인(俘人)이 탄 배 백여 척만은 모두 바다 가운데 떠 있었다. 대개 포로되어 이곳에 당도할 때까지 무릇 9일 동안에 물 한 모금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죽지 아니하니 진실로 목숨이 모진 모양이다. 뒤에 오는 남녀는 태반이 친구집 가족들이었는데, 양우상(梁宇翔 양산룡(梁山龍)을 이름)의 온 집안이 참몰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날 왜녀(倭女)가 밥 한 사발씩을 사람들에게 각기 나누어 주었는데, 쌀은 뉘도 제대로 벗기지 아니했고 모래가 반을 차지했고, 생선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뱃사람들은 배가 하도 고파서 깨끗이 씻어 말려서 요기를 했다. 밤중에 옆 배에서 여자가 울다가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옥(玉)을 쪼개는 듯하였다. 나는 온 집안이 참몰당한 뒤부터 두 눈이 말라 붙었는데, 이날 밤에는 옷소매가 다 젖었다. 따라서 절구시(絶句詩)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어디서 들려오는 죽지사(竹枝詞) 노래 / 何處竹枝詞

밤조차 삼경인데 달도 하얗도다 / 三更月白時

이웃 배가 모두 눈물짓는데 / 隣船皆下淚

가장 젖은 건 초신의 옷이로다 / 最濕楚臣衣

이튿날에 한 척의 적의 배가 옆을 스쳐가는데 어떤 여자가 급히 ‘영광(靈光)사람 영광 사람’ 하고 부르므로, 둘째 형수씨가 나가 물으니, 바로 애생(愛生)의 어미였다. 배를 따로 탄 이후로 벌써 귀신이 되었으리라고들 말하였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들이 살아 있음을 알았다. 그이가 천만 가지로 슬피 하소연하는 것을 귀로는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이날 밤부터 밤마다 통곡을 했다. 왜노(倭奴)가 아무리 때려도 그치지 않더니 필경에는 밥을 먹지 아니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절구시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한 바다 아득아득 달조차 지려는데 / 滄海茫茫月欲沈

눈물이 이슬과 함께 옷섶을 적시누나 / 淚和涼露濕羅衿

넘실넘실한 이 수면 상사한들 어찌하리 / 盈盈一水相思恨

견우 직녀 응당 이 밤 심정 알거로세 / 牛女應知此夜心

중형의 아들 가련(可憐)은 나이가 여덟 살인데 주리고 목말라서 짠 소금국을 마시고 구토설사하여 병이 나자 적이 물 속에 던지니,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오래도록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아이야 아비를 바라지 말라(兒兮莫望父)’라는 옛말이 참말이 되었다.

그후 수일이 지나서 처부(妻父)가 두 형과 더불어 작은 배 하나를 몰래 끌어내어 타고 가려고 하였는데 적이 알고서 곧 좌도(佐渡)에게 달려가 알렸다. 그래서 그 날 저녁 큰 배 하나에다 우리집 식구를 실었는데, 다른 배로부터 옮겨 온 사족의 여자가 9명이었다. 그 속에는 홍군옥(洪群玉)의 딸도 끼어 있었다. 서로들 옛 이야기를 하고서 한 바탕 슬피 울었다. 처부의 서매(庶妹) 우영(羽英)은 나이가 13세요 얼굴이 미색이었다. 그이와 서로 배를 따로 타게 되어서 생사를 알지 못했는데, 이날 와서야 비로소 처조부 및 여러 계집종이 틀림없이 죽었다는 것을 들었다. 배가 닻줄을 풀고 떠났는데, 날은 벌써 석양이었다. 안골포(安骨浦)에서 잤다.

이튿날 안골포를 출발하여 남으로 잠깐 갔다가 동으로 잠깐 갔다가 하여 한 바다를 횡단하였는데, 하루의 힘을 다하고 밤까지 계속하였다. 갑자기 닭 소리가 들리고 첫새벽 안개 속에 대륙(大陸)이 가로 뻗어 있는 것이 바라보였는데, 곧 대마도(對馬島)였다. 인가(人家)의 제도가 다르고, 의관(衣冠)도 다 괴이하게 만들어져서 처음에는 딴 세계로 알았었다. 남아가 날 적에는 진실로 뽕나무 활에 쑥대 화살로써 천지 사방을 쏘는 것이지만 그러나 몸소 왜국에 오리라는 것을 누가 생각했겠는가. 비바람 때문에 이틀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다.

이튿날 또 하나의 큰 바다를 건너 한 육지에 당도했는데, 곧 일기도(壹岐島)였다. 이튿날 또 한 바다를 건너서 장산(長山)과 큰 관시(關市)에 당도했는데 곧 장문주(長門州)의 하관(下關)이었다. 이튿날에 또 하나의 바다를 건너 해안을 따라가서 또 하나의 큰 관시에 당도했는데 곧 주방주(周防州)의 상관(上關)이었다. 바다와 산이 그림과 같고 감귤이 아름답게 빛났는데, 귀신의 소굴이 된 것이 애석하다. 이튿날에 또 한 바다를 건너서 이예주(伊豫州)의 장기(長崎 나가사키)에 정박한 후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갔는데, 굶주림과 피곤함이 너무 심하여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넘어졌다. 작은 딸이 나이가 여섯 살이어서 제 힘으로 걷지 못하므로 아내와 처모(妻母)가 번갈아서 업었다. 업고서 내 하나를 건너다가 물 속에 쓰러지자, 힘이 없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언덕 위에 있던 한 왜인이 눈물을 흘리며 붙잡아 일으키고 말하기를,

“아! 너무도 심하다. 대합(大閤)이 이 사람들을 사로잡아다가 어디다 쓰려는가? 어찌 천도(天道)가 없을소냐?”

하고, 급히 자기 집으로 달려가서 서속밥과 차숭늉을 가지고 와서 우리 한 집 식구를 먹였다. 그제서야 귀와 눈이 들리고 보였으니, 왜노 가운데도 이와 같이 착한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것은 유달리 법령이 몰아넣은 것이다. 왜노들이 수길(秀吉)을 부르기를 대합(大閤)이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10리쯤 가서 이예주(伊豫州) 대진성(大津城)에 이르러 유치되었는데, 두 형 및 처부의 가족과 한 집에 있게 되었으나 방만은 달랐다. 적은 졸왜(卒倭) 한 명과 여왜(女倭) 한 명으로 하여금 조석으로 밥ㆍ국 각각 한 사발과 생선 한 마리를 주게 하였다. 만이(蠻夷)의 이역(異域)에서 형제와 함께 있게 된 것만은 역시 하나의 다행이라 하겠다. 동지(冬至)에 옛사람의 글귀를 모아서 슬프고 답답한 심회를 풀었다.

지난 해 이날에는 어상을 받들고서 / 去歲玆辰奉御床

머리에 별을 얹고 축수의 잔 올렸더니 / 戴星先捧祝堯觴

이 해에는 유락되어 단심만이 남았으니 / 今年流落丹心在

하루 가면 수심이 실올만큼 자라난다 / 一日愁隨一線長

귀굴(鬼窟) 속에 있기 때문에 연호를 표하여 존왕(尊王)의 뜻을 붙이다.

만력(萬曆) 26년 무술(戊戌 1598)의 해도 이미 새해(1599)로 바뀌었다. 폭죽(爆竹)은 귀신을 몰아내고 연등(燃燈)은 해를 지키어, 자못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와 같으나, 그 사람들이 인면수심(人面獸心)인 것이 한스러웠다. 좋은 때와 성대한 명절일수록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슬프게 하였다. 임금과 어버이를 바라보면 모두 만 리의 큰 바다 밖에 가로막혀 있다. 바야흐로 화창한 봄을 당하여 초목과 모든 생물이 다 스스로의 즐거움이 있는데, 우리 형제 한 집안은 눈물이 가득찬 눈으로 서로 대하고 있구나. 송추(松湫)의 옛 선영은 병화(兵火)로 연소되었으리, 어느 누가 한 사발 보리밥인들 무덤 위에 뿌려 주겠는가? 물건마다 감촉함에 따라 마디마디 슬프고 쓰라려서 반드시 모춘(暮春)의 3월이나 양추(涼秋)의 9월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넋을 녹이는 것만이 아니었다.

5일 숙형(叔兄)의 딸 예원(禮媛)이 병사했다.

9일 중형의 아들 가희(可喜)도 병사했다. 그래서 형제가 짊어지고 나가서 물가에 매장했다. 우리 형제의 자녀 여섯 명 중에 세 명은 바다에 빠져 죽었고 두 명은 왜의 땅에 죽었고 작은 딸 하나만이 남았을 뿐이니, 정히 산두(山斗 한유(韓愈)를 이름)의 이른바,

무고한 너를 죽게 만든 것이 오직 나의 죄라 / 致汝無辜惟我罪

백년토록 부끄럽고 원통해서 눈물 흐른다 / 百年慙痛淚闌于

는 것과 같았다. 가련하고 슬퍼서, 도리어 그들이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부러울 따름이다.

정월 그믐 경에 명 나라 군사가 크게 이르러서 울산(蔚山)의 왜적 절반은 고래밥이 되고 호남의 여러 소굴은 단지 순천(順天)에만 남았다고 들리니, 슬픈 심정 속에서도 기쁜 소식에 황홀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사운시(四韻詩) 한 수를 지었다.

소식을 듣자니 왕사가 와서 / 聞道王師至

호남의 반은 하마 평정됐다고 / 全湖半已平

우리 임금 병환이나 없으시고 / 吾君無疾病

늙은 어버이 상기 강녕하신지 / 老父尙康寧

큰 바다에 천위 진동하자 / 鯨海天威動

적의 진엔 달무리 졌네 / 蜂屯月暈成

슬픈 정 속에서 좋은 말 들어 보니 / 哀情聞吉語

기쁜 눈물 하수가 내리쏟는 듯 / 喜淚作河傾

2월 5일 통역에게서, 평의지(平義智)의 부곡(部曲) 백여 명이 귀순(歸順)하고 나머지 항복하는 왜도 서로 잇따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또 사운(四韻) 한 수를 지었다.

말 듣자니 흉적의 서슬이 꺾여 / 聽說凶鋒折

항복서가 나날이 들어온다고 / 降書日日聞

호남에는 약탈하는 일조차 없고 / 湖南空荐食

영남에는 다만 고군뿐이고 / 嶺外只孤軍

동해에는 거센 파도 잠잠해지고 / 鯨浪淸東海

천랑성은 북두성 끼고 있다고 / 狼星拱北辰

외론 신하 비록 만 번 죽을지라도 / 孤臣雖萬死

백골엔 즐거운 흔적 있으리 / 白骨有餘欣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또 연시(聯詩) 한 수를 지었다.

봄비가 한 번 지나고 나면 / 春雨一番過

돌아갈 생각 배나 많아진다오 / 歸心一倍多

어느 때나 우리 집 담장 밑에 / 何時短墻下

손수 심은 꽃 다시 볼거나 / 重見手栽花

4월 27일은 바로 돌아가신 어머님의 기일(忌日)이다. 의복이 갖추어지지 못하고 자성(粢盛 제수)이 조촐하지 못해도 오히려 제사를 못 모시는 법인데, 하물며 왜적이 주는 남은 음식으로 감히 소고(昭告)의 정성을 바치겠는가? 그렇지만 차마 그저 넘길 수도 없어서 간략히 메 올리는 의식을 갖기로 하고, 가진 물건을 팔아서 제수를 장만하여 축(祝)하였다.

“불초한 여러 자식, 선록(先祿)을 계승 못하고, 온 집안이 침륜(沈淪)되어, 이역의 나그네 살이.

묘소는 묵어 진형(榛荊)이요, 목주(木主)도 물에 빠졌으니, 존몰(存沒)을 감념(感念)할 적, 마음 쓰리고 뼈저립니다.

가을 서리 봄 이슬에, 갱장(羹墻)을 어디 의탁하리, 날이 가고 달이 가서, 제삿날이 돌아왔으나, 객지라 지닌 것 없어, 제물이 너무 박하옵니다.

시호(豺虎 왜를 이름)와 이웃이 되니, 곡(哭)조차 다 못하고, 하늘 가를 바라보니, 초목도 흐느끼는 듯, 선령(先靈)이 아시거던, 흠향하여 주시옵소서.”

금산(金山) 출석사(出石寺)는 이예주(伊豫州) 남쪽 30리에 있었다. 그 절의 중이 자칭 말하기를,

“자기는 비전주(肥前州) 사람으로 젊은 시절에 왜사(倭使)를 따라 우리나라 서울에 와 보았다고 하며, 일찍이 탄정(彈正)을 지냈고, 나이 늙어서 은퇴하였는데, 절 아래 전토(田土)를 받아 먹고 그 인민을 부리고 있다.”

하였다. 나를 보고서 자못 예로 대하며, 부채에다 시(詩)를 청하므로 사운 칠언시 한 수를 써주었다.

금장의 명랑이 해동(일본을 이름)에 떨어지니 / 錦帳名郞落海東

머나 먼 천릿길 풍편에 맡겼다오 / 絕程千里信便風

봉성의 소식은 경해 밖에 아득한데 / 鳳城消息鯨濤外

학발의 모습은 접몽 속에 희미하도다 / 鶴髮儀形蝶夢中

두 눈 일 월 보기 부끄러운데 / 兩眼却慚同日月

일편단심 옛 조정만 기억되누나 / 一心猶記舊鴛鴻

강남이라 방초시절 뭇 꾀꼬리 요란한데 / 江南芳草群鶯亂

우공을 돌려보낼 빠른 배 있을는지 / 倘有飛艎返寓公

중이 측은한 모습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말하기를,

“이미 알고 있으나 배가 없고 또 잡혀 있으니 한탄스럽소.”

하였다. 대진성(大津城)은 높은 산 꼭대기에 의거하여 있고, 산 아래는 맑고 깊은 긴 강물이 빙 둘러 흐른다. 매양 빈 성을 타고 서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곡이 파하면 천천히 내려온다. 그래서 오언 사운시(五言四韻詩) 한 수를 지었다.

이 걸음이 일찍이 꿈속에 보여 / 玆行曾入夢

창해의 한 하늘 동쪽이었네 / 滄海一天東

성읍 층층의 봉우리 위에 터를 잡았고 / 城邑層峯山

백성들은 물 가운데 집을 두었네 / 民居亂水中

입버릇은 불계를 칭하면서도 / 恒言稱佛戒

날마다 군용을 펴 나가다니 / 常日展軍容

아무리 아름다운들 내 땅 아니어라 / 信美非吾土

남산이 몇 겹이나 가로막혔나 / 南山隔幾重

서울 죽사(竹肆)에 살던 사람이 임진년에 사로잡혔었는데, 왜경(倭京)에서 이예주로 도망해 왔다. 그가 날마다 찾아와서 말하기를,

“서로 조력하여 돌아가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당신의 힘을 입어 다시 고국의 천일(天日)을 보게 된다면 마땅히 죽음을 걸고 당신의 은혜를 갚겠소.”

하였다. 그는 은전(銀錢)도 가지고 있고 또 왜말도 잘하기에 애써 간청하였었다. 마침내 5월 25일에 밤을 타서 서쪽으로 나와 밤에 80리를 걷고 나니, 두 발에 피가 흘렀다. 낮에는 대밭 속에 숨어 있다가 이튿날 밤에 판도현(板島縣)을 지나가면서, 성문에다 큰 글씨를 써서 붙이기를,

“너희들 일본의 군신(君臣)은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켜 죄 없는 나라를 쳐서, 그 나라의 선왕의 종묘(宗廟)를 무너뜨리고, 그 나라의 선왕의 능침(陵寢)을 파내고, 그 나라의 노인과 어린이를 참살하고, 그 나라의 자손을 잡아 가고, 심지어 닭ㆍ돼지ㆍ개의 축생과 벌레ㆍ초목의 미물까지도 역시 그 해독을 면치 못하게 했으니, 대개 생민이 있은 이래로 병화(兵火)의 참혹함이 너희 군신 행위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너희들은 해와 달에 제사하여 길상(吉祥)을 구하고, 부처를 존숭하면서 복을 구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해와 달은 나의(하늘을 빌려서 하는 말임) 두 눈인지라, 하토(下土)에 조림(照臨)하여 선과 악을 나에게 알려서 화를 주게 하고 복을 주게 하는 것이요, 부처는 내가 내보내서 민생의 사표(師表)가 되어 살상을 금지하여, 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뜻을 개도(開導)케 한 것이다.

환해(環海 해내(海內)와 같은 말)의 바깥도 다 내가 덮어 주는 바요, 조선(朝鮮)의 백성도 역시 나의 적자(赤子)인데, 너희들 일방의 군신이 그들을 진멸(殄滅)하고 살상하여 씨를 남기지 아니하려고 하는데, 일월이 어찌 너를 위하여 사정(私情)을 두겠으며 부처가 어찌 너희 옳지 못한 자를 복되게 하겠느냐? 지난 해 경사(京師)의 성이 무너져 백성과 가축을 누르고 빠지게 했는데도, 너희는 깨닫지 못하고, 금년에는 동남방에 큰 수재가 나서 보리와 벼가 전혀 없게 하였는데도 너희는 징계(懲戒)하지 아니하니, 너희 한 지방의 맹롱(盲聾)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이냐? 지금 동방을 맡은 석가모니의 불서(佛書)로써 너희 군신에게 고하여, 조선 혈유(孑遺)의 백성을 위해서 너희 군신에게 명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 군신이 만약 깨닫지 못하다면 나는 장차 크게 너희 한 지방에 해(害)를 내리되 조금도 늦추지 아니할 것이니, 너희는 명념하라. 나는 말을 두 번 다시 아니할 것이니, 너희는 후회하지 말라.”

하였다. 왜인들이 귀신을 숭상하여 음식을 대할 적에는 반드시 일월에 제(祭)하고, 자나 깨나 노상 범패(梵唄)를 외우기 때문에 그들의 믿는 바에 따라 하늘의 명과 부처의 말을 빌려서 경고를 하면, 만일이라도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서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적괴(賊魁)가 6월 초순부터 병이 나서 가을에 죽었으니, 이 말이 역시 증험이 없다고 이를 수도 없다.

판도(板島)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나가서 숲 속에 쉬어 있자니, 나이가 60여 세쯤 되어 보이는 한 늙은 중이 폭포에 몸을 씻고 쌀밥을 지어 해에 제사 지내고는 바위 위에서 졸고 있었다. 그래서 통역이 가만히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서 서쪽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말하자, 그 중은 배로 풍후주(豐後州)에까지 건너주겠다고 쾌히 승낙하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몹시 기뻐하며 중을 따라 내려왔다. 통역이 앞을 서고 중이 다음에 서고 우리들은 조금 뒤떨어졌었다. 그런데 열 걸음도 못 가서 한 왜적이 졸왜(卒倭) 두 사람을 거느리고 졸지에 와서 우리들을 보고 말하기를,

“도망하는 조선 사람들이다. 칼을 받아라.”

하므로, 우리들은 목을 내밀고 칼날을 받으려고 하자, 적은 졸왜로 하여금 붙잡아 끌게 하였다. 우리들이 판도 시문(市門) 밖에 당도하니, 긴 나무 십여 개에 죽은 사람의 머리를 많이 달아 놓은 것이 있었다. 바로 적중의 고가(藁街)였다.

우리들을 그 아래에 앉히고 목을 벨 시늉을 하더니, 한 왜적이 칼을 끌어 당겨 정지시키고 우리들을 성중으로 보냈다. 길이 시문(市門)을 거치자 한 왜인이 문 안으로부터 돌연히 나와서 끌고 들어가는데, 바로 우리 집안을 사로잡은 신칠랑(信七郞)이라는 자였다. 곧 차ㆍ술ㆍ국ㆍ밥 등을 먹여 주고 3일을 머물게 하고는 강제로 대진성(大津城)으로 보냈다.

이 뒤부터는 더욱 무료하여 성 밑의 승사(僧舍)에 나가 놀았는데 중 하나가 지극한 예로 대하여 주면서 절구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현성을 처음 뵈니 꿈이런가 참이런가 / 初逢賢聖夢耶眞

나그네 신세가 된 고인이 애석하네 / 堪惜高人客裏身

달을 보나 꽃을 보나 응당 한이 있으리라 / 見月見花應有恨

부상의 나라는 다 전쟁의 티끌이기에 / 扶桑國盡戰爭塵

나는 다음과 같이 차운(次韻)하였다.

눈 같은 머리에 서릿발 같은 눈썹 / 雪髮霜眉創見眞

호추 강로 곧 전신이로세 / 胡雛康老是前身

맑은 시로 이중의 한을 다 쏟아 내니 / 淸詩寫盡泥中恨

칼을 찬 놈들과 몇 세상이 격했나뇨 / 帶劍諸奴隔幾塵

좌도(佐渡)의 아비 백운(白雲)의 집에 현학(玄鶴)이 있으므로 감회(感懷)가 나서 사운시 한 수를 지었다.

선학이 인간에 내려왔으니 / 仙鶴下人間

어느 날 지전으로 돌아가려나 / 芝田幾日還

화표주 머리에서 천년 났는데 / 千年華表柱

적간관 이곳에 또 두어 해 / 數載赤間關

세상의 속루를 벗지 못해서 / 未拂塵中累

노상 저 바다 산을 그리는구려 / 常懷海上山

언제나 모골이 바뀌어져서 / 那時換毛骨

기수를 또 다시 잡아볼거나 / 琪樹得重攀

무안현(務安縣) 아전 서국(徐國)이 대진(大津)으로 사로잡혀 갔는데 자주 찾아와서 시를 청하므로 다음과 같이 지어 주었다.

일찍이 서경의 나그네일러니 / 早作西京客

지금은 동해 사람 되었군 그래 / 今爲東海人

연륜은 하마 두 번이나 바뀌려는데 / 歲行垂再易

천도는 어찌 끝내 가난할쏜가 / 天道豈終貧

대궐이 그리워 해를 쳐다보고 / 戀闕頻看日

부모 생각에 구름을 바라보누나 / 懷親輒望雲

억지 노래라 눈물만 나고 / 强歌還迸淚

쓸쓸한 웃음이라 상이 찡그려지네 / 冷笑却成嚬

이 해 6월에 좌도(佐渡)가 고성(固城)에서 군사를 철수하여 왜경(倭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곡(部曲)을 보내어 우리 집안을 왜의 서경(西京)인 대판성(오사카)으로 강제로 가게 하여, 배를 타게 되었다. 이에 감개를 못이겨 시 한 수를 지었다.

내 나라를 떠나온 천 리 밖에서 / 去國今千里

아득아득 동으로 다시 향하네 / 迢迢更向東

응당 해돋이를 다 가자면 / 應須窮出日

도시 편풍에 맡길 뿐이네 / 都只信便風

전쟁은 헌원씨가 시작하였고 / 禍首軒轅氏

요사는 약캐던 진동(秦童) 때부터 움텄네 / 妖胎採藥童

남아로서 염원하던 사방의 뜻이 / 男兒四方志

왜놈 땅에 올 줄이야 뉘 알았으리 / 不意到倭中

또 배 안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만 생각 천 시름이 벌집과 같은지라 / 滿臆千愁若蜜房

나이 겨우 서른 살에 귀밑머리 하얗다니 / 年纔三十鬢如霜

이 어찌 계륵이 혼 골을 녹여서랴 / 豈綠鷄肋消魂骨

진실로 용안을 못 뵙는 때문이야 / 端爲龍顔阻渺茫

평일에 글을 읽어 명분 의리 중하지만 / 平日讀書名義重

후일에 역사 보면 시비가 길거로세 / 後來觀史是非長

부생이 저 요동의 천년 학 아닐진대 / 浮生不是遼東鶴

죽을 바엔 해상의 염소를 보자꾸나 / 等死須看海上羊

배가 떠난 지 8일이 되어 새벽녘에 곤히 잠이 들었는데, 배를 같이 탄 우리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경성(京城)이 이미 가까워졌다.’ 하므로, 꿈속에 놀라 일어나 바라보니 백토로 쌓아올린 성첩(城堞)이 창해(滄海) 위 운무(雲霧) 속에 돌연히 나타나고 10층의 누각이 반공에 높이 드러나 있으므로, 담이 떨리고 정신이 싸늘해져서 오래도록 진정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시 한 수를 지었다.

왕경(王京)이 가깝다고 알려주더니 / 報道王京近

왕경(王京)이 바로 곧 귀관이로세 / 王京是鬼關

호랑이 굴을 더듬자는 것이 아니라 / 非緣探虎穴

용안을 뵈올 길 없었더라네 / 無路覲龍顔

실컷 마시자는 초년 계획이 / 痛飮初年計

외롭게 갇힌 신세 언제나 돌아갈까 / 孤囚幾日還

시름이 하도 많아 꿈을 지으니 / 愁多飜作夢

별안간에 남산이 보이는구나 악비(岳飛)가 황룡부(黃龍府)에 바로 가서 통음한 일을 인용했음 / 倏忽見南山

우리나라 병선(兵船)이 왜적에게 빼앗기게 되어 우치하(宇治河) 입구에 와 있음을 보고 또 한번 서글퍼 했다.

애석하다 저 황룡축은 / 可惜黃龍舳

어찌하여 푸른 바다 동쪽에 있나 / 胡爲碧海東

장군이 군율을 잃은 게지 / 將軍自失律

제작이야 왜 잘 되지 않았겠는가 / 制作豈非工

위에는 비가 새서 아장이 꺾이고 / 上雨牙槳折

중권에는 호절(호랑이를 그린 기)이 보이지 않네 / 中權虎節工

내 삶이 진실로 범경 같으니 / 吾生猶泛梗

너를 보매 눈물이 절로 난다 / 見爾涕無從

대판에서 또 작은 배에 실려 복견성(伏見城)으로 옮기는데, 밤에 배 안에서 자면서 절구시 한 수를 지어 답답한 심회를 풀었다.

노화에 배 닿자 달 한창 밝고 / 舟着蘆花月正明

오경이라 모래 둑엔 자는 백구 놀란다 / 五更沙岸宿鷗驚

해 묵은 배는 내 집이 되고 / 經年海舶爲吾室

머리 센 사공의 노 젓는 소리 / 頭白篙工上棹聲

복견에 당도하자 왜적은 우리 가족을 태창(太倉)의 빈 집에 데려다 두고서 늙은 왜인 시촌(市村)으로 하여금 맡아 지키게 하였다. 우리나라 사인(士人)인 동래(東萊) 김우정(金禹鼎)ㆍ하동(河東) 강사준(姜士俊)ㆍ강천추(姜天樞)ㆍ정창세(鄭昌世)ㆍ함양(咸陽) 박여집(朴汝楫)ㆍ태안(泰安) 전시습(全時習)ㆍ무안(務安) 서경춘(徐景春) 등이 다 사로잡혀 온 속에 끼어 있어, 연일 찾아와서 만났다. 우정(禹鼎)은 전라 좌병영(全羅左兵營)의 우후(虞侯) 이엽(李曄)에 대해 말하였다. 그가 청정에게 사로잡히자 청정은 수길에게로 보내니, 수길이 대우하기를 지극히 후하게 하여, 장어(帳御)와 음식을 모두 자기들 생활과 같이 하여 주었다. 이엽은 적으로부터 받은 비단 등속을 다 흩어서, 임진년에 사로잡혀 온 사람들과 결탁하여, 배를 사서 서쪽으로 탈출했다. 일행이 적간관(赤間關)에 당도하자 추적하는 자가 이미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에 이엽은 칼을 빼어 스스로 찌르고 바다 가운데로 떨어졌다.

적은 이엽의 시체를 끌어내고,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거리에서 수레에 사지를 걸어 찢어 죽였다. 이엽은 글에 능하여 배를 출발시키려 하면서 시 한수를 지었다 한다.

봄이 금방 동으로 오니 한이 금방 길어지고 / 春方東到恨方長

바람 절로 서쪽으로 부니 생각도 절로 바쁘구나 / 風自西歸意自忙

밤 지팡이 잃은 어버이는 새벽달에 부르짖고 / 親失夜筇呼曉月

낮 촛불처럼 아내는 아침 볕에 곡을 하리 / 妻如晝燭哭朝陽

물려받은 옛 동산에 꽃은 응당 졌을거고 / 傳承舊院花應落

대대 지킨 선영에는 풀이 정녕 묵었으리 / 世守先塋草必荒

모두 다 삼한이라 양반집 후손인데 / 盡是三韓侯閥骨

어찌 쉽게 이역에서 우양과 섞이겠나 / 安能異域混牛羊

나는 이를 듣고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마에서 땀이 돋았다. 아! 무사(武士) 가운데도 이런 사람이 있단 말인가. 나는 글을 읽은 사람이 아니던가? 인하여 그 시에 보운(步韻)하였다.

장군의 기개야말로 하늘 같이 길고 긴데 / 將軍氣槩與天長

어느 사람 바삐 도망갔다 뒤집어 말하네 / 何者飜論此去忙

의골은 흔연히 동해 밑에 잠겼는데 / 義骨樂沈東海底

맑은 바람은 멀리 수양산을 대었구려 / 淸風遙接首山陽

매달린 머리, 비를 맞아 씻기는 게 좋을지니 / 竿頭好受秋霖洗

흙에 묻혀 무엇하리 변방 풀 묵을텐데 / 埋土寧敎塞草荒

만권의 글을 읽은 서생이 면목 없네 / 萬卷書生無面目

두 해를 궁발에서 저양을 먹이다니 / 兩年窮髮牧羝羊

또 전운(前韻)에 따라 시를 지었다.

임의 은혜 바라보니 바다 하늘 길고 긴데 / 君恩北望海天長

갈절이 동에 뻗어 세월이 바쁘도다 / 葛節東偏歲月忙

물건 보면 해로 향하는 해바라기에 부끄럽고 / 觀物每慚葵向日

가을 되면 볕 따라드는 기러기가 부럽구려 / 逢秋却羨雁隨陽

궂은 비와 함께 넋은 멀리 변방으로 날고 / 魂追斷雨飛遙塞

바람 따라 마음은 대황을 뒤흔드네 / 心逐雄風撼大荒

벗님의 진중한 뜻 하도나 감사하이 / 多謝故人珍重意

한 병 술 보내어 간양을 위문하다니 / 一壺椒醑慰看羊

또 전운(前韻)으로 거듭 시를 지었다.

만 리의 청구라 바닷길이 멀고 먼데 / 萬里靑丘海驛長

꿈 혼은 어디서 바삐 가고 바삐 오나 / 夢魂何自去來忙

삼청 이별의 한은 봉래산 밖이거니 / 三淸離恨蓬山外

가고픈 일편단심 한강의 남쪽일세 / 一片歸心漢水陽

생각하면 인생이란 참으로 잠깐이라 / 算得人生眞抄忽

천도를 살펴보면 막연한 것이 아니라네 / 看來天道豈蒼荒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함은 우리의 가훈이라 / 成仁取義吾家訓

아이들도 견양에게 절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네 / 童子猶慙拜犬羊

강사준(姜士俊)ㆍ정창세(鄭昌世)ㆍ하대인(河大仁)에게 시를 지어 주었다. 진주(晉州)의 세 큰 성씨는 강ㆍ하ㆍ정을 두고 말한 것이다. 절역(絕域)에서 만나니 지극히 서로 반갑기 때문이다.

기이한 인물이 방장산을 내려와서 / 方丈山高降異人

진주라 세 성바지 자손들이 연접해 사네 / 晉陽三姓接雲因

대대로 드러난 벼슬집 후예들이 / 如何赫世貂蟬骨

마침내 염황의 유리신세 되다니 / 竟作炎荒瑣尾身

단속사 찬매화는 꽃 절로 피었겠지 내 선조 통정(通亭)이 매화를 단속사에 심었는데, 산승(山僧)이 그 매화를 정당매(政堂梅)라 불렀다. 그리고 매화가 말라 죽으면 매번 다른 매화를 그 땅에다 심었음. / 斷俗寒梅花自發

명가의 옛 마을에 풀이 자라 봄일걸세 / 鳴珂舊里草空春

동황이 혹시나 동풍의 편 빌려 주면 / 東皇倘借東風便

흰 이슬 푸른 벌에 다시 이웃 맺으리라 / 白露靑原更卜隣

또 전운을 달아서 시를 지었다.

이역에서 고국 사람 서로 만나니 / 絕域相逢故國人

마음 상해 연유조차 차마 못 묻네 / 傷心不忍問由因

북해라 3년의 절이 나는 부끄러운데 / 慙吾北海三年節

남관이라 팔척장신 그대가 부럽구려 / 愛子南冠八尺身

굳센 풀 아니 꺾여 서리 뒤에 새파랗고 / 勁草不摧霜後綠

찬 매화는 오히려 설날 전의 봄 그린다오 / 寒梅猶戀臘前春

술잔 앞에 눈물 멎고 도리어 웃음 지으니 / 樽前破涕還成笑

이로 신세 덕 있는 그대와 이웃했네 / 泥露多君德有隣

기묘명현(己卯名賢) 대사성(大司成) 김식(金湜)의 손자요, 학사(學士) 김권(金權)의 조카인 흥달(興達)ㆍ흥매(興邁) 형제가 내가 학사와 더불어 친분이 있다고 하여 자주 서로 찾아오고 또 쌀과 포목을 마련하여 나의 기한(飢寒)을 구해 주므로, 시로써 사례를 표했는데, 다시 전운을 첩용(疊用)하였다.

문신의 이역에서 이 사람을 얻어보고 / 文身異地得斯人

애써 뒤를 캐니 특별한 인연 있네 / 作意追後別有因

학사의 풍류는 조카에게 전했어라 / 學士風流傳令姪

명현의 기골은 전신이라 보겠구려 / 名賢氣骨見前身

서리 찬 겨울철에 강신포가 감사한데 / 霜寒更謝江神布

주머니가 비었으니 국미춘을 사지 못해 / 囊罄難謀麴米春

오늘날 서로 만나니 눈물뿐이라 / 今日相逢惟涕淚

다른 해에 방린을 허락하려나 / 他年幸許接芳隣

또 전운을 써서 시를 지었다.

지난해 금문에서 대조하던 그 사람이 / 上歲金門待詔人

오늘의 식미 신세 묻노라 뉘 탓이냐 / 式微今日問誰因

구차스레 살자하니 삼생(군(君)ㆍ사(師)ㆍ부(父)를 가리킴)의 의 저버렸고 / 偸生却負三生義

나라에 허한 몸이 끝내는 나라 여읜 몸 되어라 / 許國終爲去國身

호사나 있을까 속절없이 천 리의 꿈을 믿었는데 / 好事空憑千里夢

궁벽한 땅에 또 일년의 봄 만났다오 / 窮鄕又値一年春

강상은 만고에 인륜이 중한지라 / 綱常萬古人倫重

우리들이 어찌 저 새 짐승과 이웃되리 / 我輩寧爲鳥獸隣

또 전운을 써서 시를 지었다.

연상이라 만 리 초수의 신세 / 燕霜萬里楚囚人

나그네살이 삼년은 숙명의 인연일레 / 旅泊三年定宿因

시서랑 예악이랑 남자의 일 다 배우고 / 禮樂詩書男子事

이목이 총명한 장부의 몸 지녔다오 / 聰明耳目丈夫身

타생에는 행여나 난리 세상 만나지 마소 / 他生莫値干戈日

즐거운 일 헛되이 도리 봄만 보내는 걸 / 樂事空拋桃李春

나라 형세 간난한 것 누가 들어 만들었나 / 王業艱難誰作厲

청혈을 가져가 궁린에게 묻고 싶네 / 欲將靑血問宮隣

기해(己亥)년 설날 감상(感傷)에 젖어 시를 지었다.

경상의 조촐함이 치진 속에 섞일소냐 / 瓊霜不忍混緇塵

성월(星月)이 시름 던져 밤마다 새롭구려 / 璧月關愁夜夜新

마각은 나지 않고 푸른 봄만 찾아오니 / 馬角不生靑歲至

길손 마음 도리어 철 만날까 겁이 나네 / 客心還自劫逢辰

왜승(倭僧) 조고원(照高院)이라는 자는 그들 황제(皇帝)의 숙부(叔父)인데, 출가(出家)하여 대불사(大佛寺)에 거주하였다. 그는 중을 시켜 부채 열 자루를 보내면서 시를 청하여 왔다.

맑은 바람 부쳐주는 열 폭 만전을 / 十幅蠻牋陣陣淸

보내주는 스님 정이 감사하구려 / 寄來深荷上人情

구차한 삶 하늘보기 부끄럽더니 / 偸生久値看天日

이제부터 낯 가리고 다닐 수 있구려 / 從此氈城掩面行

적괴(賊魁) 수길이 죽자, 북쪽 교외에 매장하고, 그 위에다 황금전(黃金殿)을 짓고, 왜승(倭僧) 남화(南化)가 큰 글씨를 써서 그 문에 새기기를,

크게 밝은 일본이여 한 세상 호기 떨쳐라 / 大明日本 振一世豪

태평의 길 열어 놓아 바다 넓고 산 높도다 / 開太平路 海濶山高

하였으므로, 일찍이 나가 노닐다가 붓에다 먹을 발라 그 옆에다,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반 세상의 경영이 남은 것은 한줌 흙만 / 半世經營土一坏

십층의 황금전은 부질없이 높다랗군 / 十層金殿謾崔嵬

조그마한 땅이 또한 다른 손에 떨어졌는데 / 彈丸亦落他人手

무슨 일로 청구에 권토하여 오단말가 / 何事靑丘捲土來

왜승(倭僧) 묘수원(妙壽院)의 순수좌(舜首座)라는 자가 뒤에 와서 나를 보고 말하기를,

“지난번에 대합(大閤)의 총전(塚殿)에 붙은 글씨를 보니, 바로 족하(足下)의 글씨였습니다. 왜 스스로 몸을 아끼지 않습니까?”

하였고, 수왜(守倭) 시촌(市村)이라는 자는, 우리 가족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형제이고 생구(甥舅)라고 하고는 형이 나가면 동생을 머물게 하고 생질이 나가면 외삼촌을 머물게 하였다.

나는 중국 차관(差官)모국과(茅國科)ㆍ왕건공(王建功) 등이 와서 사개(沙蓋)의 관(館) 왜의 이름으로는 계(堺)인데 대개 서해상의 시관(市館)임. 에 있다는 말을 듣고서, 우리나라 사람 신계리(申繼李)와 함께 그곳에 가서 문을 두드려 문지기에게 뇌물을 주고 들어갔다. 두 차관은 서쪽으로 향해 의자에 앉고 나에게는 의자 하나를 주어 동쪽으로 향해 마주 앉게 하고는 지극히 따뜻하게 대해 주고 차와 술을 내왔다. 나는 울면서 청하기를,

“듣자하니 왜노가 배를 정돈하여 장차 행리(行李)를 호송할 모양인데 원컨대 배 안의 한 졸병을 삼아서 고국에 돌아와 형(刑)을 받게 해주소서.”

하니, 천장(天將)은 애련(哀憐)히 여기며 말하기를,

“공은 어떤 왜인에게 기탁하고 있는가?”

하였다. 좌도(佐渡)라고 하자, 천장은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가강(家康)에게 통지하여 좌도로 하여금 그대를 보내 주도록 하겠다.”

하였다. 신계리라는 자는 본시 경박하여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며 하는 말이,

“수길이가 죽어서 나라에 장차 큰 난리가 날 것이니 왜적은 앞으로 다 죽을 것이다.”

하니, 대마도 통역이 우리나라 말에 통달하여서, 달려가서 전수(典守)하는 자인 장우문(長右門)에게 고하였다. 장우문은 행장(行長)의 형인지라, 우리가 문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포박하여 별실에 가두었고, 신계리는 별도로 다른 곳에 포박하여 두었다.

저녁에 수레에 걸어 사지를 찢어 죽일 모양이므로 천장(天將)이 재삼 구원하여 말하기를,

“저 사람이 찾아온 것은 단지 늙은 자기 아버지의 소식을 묻기 위함이요, 다른 사단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니, 장우문은 그 청을 거역하기 어려워서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죄인이 높은 곳에 올라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사생을 초월한 때문이다. 돌아와서 두 형을 대하고는 한번 웃을 뿐이었다.

내가 왜의 땅에 들어온 후로 뼈라도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일찍이 한 순 간도 풀어진 적이 없었다. 왜국의 풍습은 돈만 있으면 귀신이라도 부릴 수 있다. 그래서 드디어 왜승(倭僧) 순수좌(舜首座)를 따라 글씨 품을 팔아서 은전을 얻고는, 남몰래 임진년에 포로된 사람 신계리ㆍ임대흥(林大興) 등과 함께 서로 결탁하였다. 중형이 계리 등을 거느리고 은 80문(文)을 주고서 배 한 척을 사서 배를 수리하는 일이 완결됨을 기다렸다가 모두 행동을 취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계리가 경박하여 또 왜에게 누설하니, 좌도가 중형 및 계리 등을 잡아다가 대판에 가두고서 하루 한 사람씩 죽이기로 하였다. 그런데 중형이 왜말을 모른다는 점으로 보아 필시 계리 등이 유인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흘 동안 가두어 두었다가 복견성으로 돌려보냈다.

우리나라 사람 강사준(姜士俊) 등이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므로, 좌중에서 시 한 수를 지어 답답한 심정을 풀었다.

쳐다보니 산하는 옛적과 다른데 / 擧目山河異昔時

신정에는 오히려 초수의 설움일레 / 新亭猶作楚囚悲

오늘의 이 모임이 어디메냐 묻는다면 / 如今高會問何地

산은 바로 애탕의 우치하라 일러다오 / 山是愛湯河宇治

왜승(倭僧) 가고(加古)가 병풍에다, 누르고 흰 국화ㆍ여랑(女郞 여자 또는 창기를 말하기도 함)ㆍ견우화(牽牛花)를 그려 놓고, 나에게 시를 써 달라고 청하였다.

삼경의 가을 바람 간밤에 서리 내려 / 三徑秋風夜有霜

담백색 주렁주렁 경황색 섞이었네 / 離離淡白雜輕黃

중양의 꽃송이를 오히려 따 봄직한데 / 重陽靑蘂猶堪摘

무슨 일로 견우화에 여랑까지 겹쳤는가 / 何事牽牛更女郞

또 한 폭에는 기화(琪花)ㆍ요초(瑤草)를 그렸기로 다음과 같이 썼다.

고운 꽃 고운 풀 이름조차 모를레라 / 瓊花瑤草不知名

구십일 봄 빛에 분수 밖의 영화로세 / 九十春光律外榮

밝은 달 다락 앞에 보내줄 양이면 / 明月樓前如可寄

미인은 응당 먼 곳 사람 정을 알리 / 美人應識遠人情

순수좌(舜首座)는 화답하여 다른 폭에 시를 썼다.

두어 폭 국화 색이 어울려 진기한데 / 數莖叢菊色交奇

먼 손님 새 시제도 역시 서로 알맞구려 / 遠客新題亦自宜

높은 가을 서리 이슬 아래에도 변함 없는 절의거니 / 節義高秋霜露底

이 꽃을 대하면 내 스승이라 부르네 / 對花猶道是吾師

수길이 두 번째 우리나라를 침략할 적에 여러 장수에게 명하기를,

“사람의 귀는 각각 둘이지만 코는 하나다.”

하고, 군사 한 명이 우리나라 사람의 코를 하나씩 베어서 수급(首級)을 대신케 하였다. 그것을 왜경으로 수송케 하여 쌓아 놓은 것이 하나의 구릉(丘陵)을 이루자 대불사(大佛寺) 앞에 묻으니 거의 애탕산(愛宕山)의 산허리와 그 높이가 같았다. 혈육의 참화는 이를 들어 가히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쌀을 모아 제사 지내려고 하면서 나에게 제문을 지으라고 하기에 다음과 같이 지었다.

“코와 귀는 서쪽에 묻혀 언덕을 이루었고, 긴 뱀은 동쪽에 감추어 있도다. 제파(帝羓)에 소금을 재이니 포어(鮑魚)가 향기롭지 못하도다.”

경자년(1600, 선조 33) 2월에 적장(賊將) 좌도가 수왜(守倭)를 불러 우리집에 대한 방수(防守)를 늦추라고 하니, 수왜는 곧 나가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바로 순수좌를 찾아가 보고서 돌아가기에 편리한 길을 알아보았다. 상소 중에 있음 4월 초 2일에 왜경을 출발하여, 배를 타고는 절구 시 한 수를 지었다.

임의 은혜 적굴 속의 수인에게 미치어 / 聖恩遙及窖中囚

이역을 떠난 돛은 보릿가을 가까워라 / 絕域歸帆近麥秋

봉도는 아득아득 창해는 넓고 넓은데 / 蓬島渺茫滄海濶

충의를 가득 실은 외로운 저 배 한 척 / 却將忠義滿孤舟

일기도(壹岐島)에 이르러서 풍우 때문에 열흘 동안을 머무르고 산에 올라 하늘에 바람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이튿날 새벽에는 별과 달이 밝았고 풍백(風伯)이 길을 인도했다. 때는 5월 5일이었다.



6. 발문(跋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