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엄지족 단골 자판 ‘천지인’이 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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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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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기본 자판 쿼티로 변경

삼성전자가 1990년대 애니콜 시절부터 적용해왔던 ‘천지인’ 자판 대신 쿼티(QWERTY·컴퓨터 자판과 같은 형태)를 자사 스마트폰 기본 자판으로 변경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글을 가장 정확하고 빠르게 입력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여겨졌던 천지인 자판이 쿼티 자판에 익숙한 Z세대들의 외면을 받으며 30년 만에 뒷자리로 물러난 것이다.

11일 삼성전자는 올해 출시한 최신 스마트폰 갤럭시S24 시리즈부터 기본 자판을 쿼티로 바꿨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사용자 조사를 한 결과 쿼티 자판이 사용자들에게 더 친숙하고 사용하기 편리하다는 의견이 많았다”며 “편의성을 고려해 갤럭시S24 시리즈부터 천지인에서 쿼티 형태로 기본 자판을 변경했다”고 말했다. 다만 삼성전자는 천지인 자판을 선호하는 사용자들을 위해 설정에서 쿼티 대신 천지인을 기본 자판으로 바꿀 수 있는 옵션을 남겨뒀다.

그래픽=박상훈

영욕의 국가표준, 천지인

천지인은 1994년 개발 당시부터 삼성전자 휴대전화를 대표하는 상징적 기능이었다. 삼성은 훈민정음 창제 원리에 따라 ‘ㅣ, ·, ㅡ’ 세 자판만 이용해 모든 모음을 표기할 수 있는 천지인 자판을 개발해 애니콜 초기 모델부터 휴대전화에 탑재했다. 천지인 입력 체계는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낼 수 있는 시대가 열렸던 1990~2000년대 전성기를 맞았다. 스마트폰 업계 관계자는 “삼성의 천지인 자판이 LG의 나랏글, 팬택 스카이 등 경쟁사 자판보다 간편하다는 입소문을 타며 삼성의 휴대전화 점유율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고 했다.

문제는 개발 7년째인 2001년 불거졌다. 삼성전자에 근무하며 천지인 자판을 개발한 직원 최모씨는 그해 회사가 자신의 특허권을 가로채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는 내용의 부당이익반환청구소송을 법원에 제출했다. 그는 “삼성전자로부터 받아야 할 부당이익금이 약 266억원에 이른다”며 “이 중 10억원을 먼저 돌려달라”고 주장했다. 삼성은 개발 당시 개발진에게 보상금으로 21만원을 지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는 2003년 삼성과 합의하고 소송을 취하했다.

비슷한 시기 삼성은 외부에서도 천지인을 둘러싼 소송전에 휘말렸다. 최씨가 소송을 제기한 이듬해인 2002년 개발자 조관현씨가 삼성이 탑재한 천지인은 자신이 1996년 낸 특허라며 삼성전자를 상대로 900억원에 달하는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삼성과 조씨는 법정 다툼을 이어가다가 2008년 합의를 하고 소송을 취하했다. 합의 과정에서 천지인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은 삼성 측이 조씨에게 합의금을 지급했지만, 정확한 금액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후 조씨는 자신의 특허를 조건 없이 기증했고 2011년 천지인은 국가 표준으로 채택이 되며 국내 경쟁사 스마트폰은 물론 애플 아이폰에도 탑재됐다.

천지인 시대 저물다

2010년대 들어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며 터치 패널 도입 등으로 자판이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이 넓어졌지만, 천지인의 인기는 이어졌다. 한 글자를 치고 나서 일일이 밀어쓰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쳐야 하는 타수가 많다는 단점에도 한 손으로 입력하기 쉬운 데다가 처음 사용하는 사람도 직관적으로 쓰기 좋다는 장점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천지인 자판을 쓰면 옛날 사람’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며 논란이 커지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태블릿PC나 노트북의 쿼티 자판에 익숙한 Z세대들이 천지인을 외면하기 시작한 것이다. 휴대전화 기종과 관계없이 쿼티 자판을 설정해 쓰는 젊은 세대가 급증했고, 온라인상에서 천지인 사용자들을 조롱하는 경우도 생겼다. 삼성전자도 이 같은 변화에 맞춰 30년 만에 기본 자판 설정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젊은 층을 고객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사용자들의 선호도는 물론 외부로 보이는 브랜드 이미지도 신경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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