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로 성과 못 내자 중국 지도부 불만 커져
대기금 전·현직 고위관계자 줄줄이 조사받아
시진핑 국가주석 ‘반도체산업 굴기 꿈’ 휘청
중국 경제매체 차이신(財新) 등에 따르면 반부패 사정기구인 공산당중앙기율검사위원회(기율검사위)는 지난 9일 두양(杜洋) 전 총감과 류양(劉洋) 투자2부 총경리, 양정판(楊征帆) 투자3부 부총경리 등 반도체대기금의 자금운용을 맡고 있는 국유기업인 화신(華芯)투자관리의 전·현직 고위 관계자 3명을 엄중한 당 기율위반 및 위법혐의로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율검사위는 앞서 지난달에도 딩원우(丁文武) 반도체대기금 총재, 루쥔(路軍) 전 화신투자 총재와 가오쑹타오(高松濤) 전 화신투자 부총재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딩 총재는 반도체 등 정보통신정책을 총괄하는 공업정보화부의 전자정보국장 출신으로 2014년 반도체대기금 출범 이후 현재까지 수장을 맡았다.
반도체대기금은 2014년 중국 정부가 국내 반도체산업을 육성해 해외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만든 빅펀드다. 그해 1기 1390억 위안, 2019년 2기 2040억 위안 등 2기에 걸쳐 모두 3430억 위안(약 66조 5000억원) 규모의 자금을 조성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반도체 자립 구상에 따라 중국 재정부와 국가개발은행 등 정부기관과 중국연초(中國煙草), 중국이동(中國移動) 등 국유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돈을 댄 덕분이다. 마련된 기금은 중국 내 100여개 반도체 제조와 설계, 패키징, 테스트, 설비, 소재 등 반도체 기업에 집중적으로 투자됐다.
더군다나 샤오야칭(肖亞慶) 공업정보화부장(장관)도 기율위 조사를 받고 있다. 반도체대기금과의 연관성은 아직까지 드러난 게 없지만, 반도체산업 육성정책을 실패로 몰고 간 책임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샤오 부장은 중국의 핵심 국유기업인 90여개 중앙기업을 총괄하는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 주임, 반독점 당국인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 국장 등을 지냈으며 공산당 지도부인 중앙위원(서열 204위 이내)이기도 하다.
반도체대기금의 최대 수혜자인 칭화유니(紫光)그룹도 수사대상에 올랐다. 자오웨이궈(趙偉國) 전 칭화유니그룹 회장이 지난달 당국에 연행됐고, D램사업부를 총괄했던 댜오스징(刁石京) 전 칭화유니그룹 총재도 조사를 받고 있다. 댜오 전 총재는 딩 총재와 과거 공업정보화부에서 함께 근무하며 친분을 쌓은 동료로 2018년 5월 칭화유니그룹에 합류했다.
중국 사정당국이 반도체 분야에 대한 감찰에 나선 것도 이때부터다. 지난해 11월 가오 전 부총재가 엄중한 기율 위반으로 조사를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2014년 10월부터 2019년 11월까지 화신투자 부총재를 맡았던 그는 반도체대기금이 지문인식 회사인 후이딩커지(匯頂科技) 지분을 매입하는 전 과정에 참여했다. 당시 발생했던 내부자거래 혐의로 조사를 받는 것으로 확인됐다. 자오 전 회장은 개인회사에 칭화유니그룹 자회사에 일감을 몰아준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그동안 오는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높인다는 목표 아래 국가전략 사업으로 반도체 굴기에 나섰다. 반도체대기금이 투자대상을 결정하면 지방정부와 각종 금융사, 민간기업들까지 자금을 보태면서 수조억원대 프로젝트가 조성됐다. 중국 정부의 각종 세제 혜택과 천문학적 자금 지원에 힘입어 기업들은 너도나도 앞 다퉈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변변한 기술도 없이 정부자금을 따내는 ‘먹튀’가 속출했지만 반도체대기금 1기의 실패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다. 2021년 중국 내 반도체 집적회로(IC) 생산량은 3594억개로 전년보다 33.3% 증가해 증가율이 전년의 배에 달했다. ‘중국판 TSMC’로 불리는 SMIC가 지난달 7나노미터(㎚·10억분의1m) 첨단공정 개발에 성공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반도체공정은 7나노부터 첨단공정으로 분류하는데, 미국의 제재로 SMIC가 극자외선(EUV) 장비가 없는 상황에서도 이룬 성과다. 이에 따라 SMIC는 글로벌 파운드리 강자인 TSMC·삼성전자와의 기술격차를 기존의 5년에서 2~3년으로 단축시켰다는 평가도 나온다.
어쨌든 이번 중국의 반도체대기금 관련 대규모 사정 바람은 미국의 중국에 대한 반도체 압박이 커지고 가운데 성적을 내지 못한 펀드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불편한 심기가 표출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은 반도체대기금 사정은 부패와 비효율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반도체대기금에 대해 중국 지도부가 분노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미·중 기술패권 전쟁에서 밀리고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