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빼고 다 바꿔라” 삼성式 개혁 드라이브 건 이명희 신세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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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10.11. 오후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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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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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 경영’ 강화하던 신세계그룹, 실속 없는 성장 제동
실적 부진에 무리한 M&A... 작년 그룹 순차입금 14조 넘어
9개 계열사에 대표는 4명... 통합·축소 칼바람 예상
이마트 매출 넘은 쿠팡, 고삐 쥔 사이 ‘유통 공룡’ 타이틀 뺏길라

“회장님이 마음에 안 들어 했다.”

지난달 20일 단행된 신세계그룹 정기 임원 인사는 역대급 물갈이 인사로 관심을 끌었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당초 신세계그룹은 경영 위기감 극복을 위해 예년보다 한 달가량 앞당긴 지난달 15일 정기 임원 인사를 단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정유경 총괄사장이 승인한 임원 인사 명단을 받아 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 이를 반려하고 판을 흔들었다.

며칠 뒤 발표된 임원 인사는 ‘파격’ 그 자체였다. 그룹 계열사 수장 9명, 전체의 40%가 교체됐다. 이 과정에서 정 부회장과 정 총괄사장이 신임했던 임원들이 떠나고, 그 자리를 이 회장 사람들이 채웠다.

그래픽=정서희

‘정용진의 남자’라 불리던 강희석 전 이마트·SSG닷컴 대표가 경질되고, 조선호텔앤리조트 대표이사로 있던 한채양 대표가 할인점(이마트)·슈퍼(에브리데이)·편의점(이마트24) 3사의 수장이 됐다.

컨설턴트 출신인 강 전 대표는 정 부회장의 신임을 얻어 2019년 신세계그룹에 합류, 이마트의 온오프라인 사업을 이끌어 왔다. 업계에 따르면 강 전 대표는 이번 인사에서 총괄사장으로 승진할 예정이었으나, 이 회장이 이를 반려하면서 회사를 떠나게 됐다.

백화점을 운영하는 신세계 역시 정 총괄사장이 발탁한 손영식 대표가 물러나고, 신세계센트럴시티 수장인 박주형 대표가 겸직하게 됐다. 또 송현석 신세계푸드 대표가 신세계엘앤비 대표를 겸직하고, 임영록 신세계프라퍼티 대표가 조선호텔앤리조트 대표를 함께 맡게 됐다.

‘올드맨’도 부활했다. 스타벅스커피코리아와 자주를 이끌다 지난 5월 신세계백화점 신성장추진위원회 대표로 자리를 옮긴 49년생 이석구 대표가 신세계라이브쇼핑의 대표로 선임됐다.

정 부회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정동혁 대외협력본부장(부사장)도 짐을 쌌다. 정 전 부사장은 예술의전당 재임 시절 정용진 부회장과 인연으로 2013년 신세계그룹 전략실에 합류했다. 이후 이마트 대외협력본부장, 정책지원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실적 부진·M&A로 재무 부담 가중... 신뢰 잃은 남매

이 회장은 일찌감치 이마트는 아들인 정 부회장에게, 백화점(신세계)은 딸인 정 총괄사장에게 경영을 맡겨왔다. 2020년에는 자신이 보유하던 이마트와 신세계 지분 8.2%씩을 각각 정 부회장과 정 총괄사장에게 증여해 남매 경영 구도를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픽=정서희

그러나 이번 인사에서 남매가 신임하던 측근들이 모두 물러나고, 이 회장 측근으로 불리던 인사들이 주요 계열사 수장이 되면서 다시 이 회장 체제로 회귀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한채양, 박주형 대표 모두 이 회장 직속인 그룹 전략실 출신이다.

이 회장이 경영에 복귀한 이유는 실적 부진이 계속된 데다, 지마켓 등 잇따른 인수합병(M&A)으로 그룹의 재무 부담이 가중되고 있어서다.

2021년 이후 지마켓(3조6000억원), W컨셉(3000억원), 스타벅스(에스씨케이컴퍼니) 지분 추가 취득(5000억원), 신세계야구단 인수(1000억원), 쉐이퍼 빈야드 와이너리 인수(3000억원) 등을 추진한 신세계그룹은 2017년 6조3000억원(그룹 합산)이던 순차입금 규모가 지난해 말 14조2000억원으로 불어났다. 이 과정에서 이마트 성수 본사를 매각해 자금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실속 없는 성장이 이어졌다. 지난해 그룹 합산 매출이 37조5700억원으로 전년 대비 12% 성장했으나, 같은 기간 합산 영업이익은 948억원으로 18%가량 하락했다. 영업이익률은 2.5%에 불과했다.

올 상반기 신세계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14% 감소했고, 이마트는 394억원의 손실이 났다. 같은 기간 이커머스 업체 쿠팡이 매출 15조3749억원으로 이마트(14조4000억원)의 매출을 넘어서며, ‘유통 공룡’ 타이틀까지 내주게 됐다.

여기에 지난 6월 출범한 통합 유료 멤버십 ‘신세계유니버스’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다.

유통업계에선 “본업도 어려운데 벌인 일을 통제하기 힘든 지경이 되니 회장이 직접 해결에 나선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한 재계 인사는 “이번 인사를 보고 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꾸라던 이건희 회장이 떠올랐다”라며 “1~2년이 되도록 결과물이 안 나오면 인사로 말하는 게 삼성 스타일이다. 이 회장의 눈엔 현 상황이 선을 넘은 걸로 보였을 것”이라고 했다.

2010년 호암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여동생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얼굴을 비비며 우애를 과시하고 있다. /조선DB

뒷수습 나선 회장님... 구조조정 칼바람 예상

업계에선 신세계그룹이 향후 2~3년간 관리형 경영을 이어갈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백화점과 이마트, SSG닷컴(쓱닷컴) 모두 재무통 대표가 이끄는 만큼, 보수적이고 경영으로 재무구조를 안정화한 후 다시 투자를 늘려갈 거란 관측이다.

주요 계열사를 겸직 대표로 둔 것에 대해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위해서란 해석이 나온다. 한 신세계그룹 임직원은 “임원 월급 아끼려고 대표를 겸직시켰겠나? 사업부를 축소해 실속 없는 일을 정리하라는 의미 아니겠냐”라며 “곧 구조조정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특히 이마트·에브리데이·이마트24의 구조조정이 예상된다. 이번 인사에서 신세계그룹은 3개 회사를 한 대표가 총괄하게 하면서, 황운기 이마트 상품본부장에게 슈퍼와 편의점 등 3사의 상품본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

시장에선 앞서 마트와 슈퍼의 상품 조달(소싱)을 통합한 롯데쇼핑처럼 이마트 역시 통합 효율화를 끌어낼 거란 관측이 나온다. 이진협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앞서 롯데쇼핑이 상품 통합을 통해 매출총이익(GPM)을 2% 개선했는데, 이마트가 유사한 방식으로 상품기획(MD) 부문을 통합하면 1%만 개선돼도 2000억원의 이익 개선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신세계의 경우 백화점의 실적 반등과 함께 광주신세계 확장·이전 등을 통한 신성장동력 발굴에 집중할 전망이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신세계가 명품을 선점해 업계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이 회장은 더현대서울과 같은 차별화된 혁신을 요구한 것으로 안다”라며 “센트럴시티 대표에게 백화점 대표를 맡긴 이유도 오프라인 공간을 활용한 혁신을 추진하라는 시그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타필드 신규 출점과 화성 테마파크 개발, 동서울 터미널 등 계획된 투자 규모 등을 고려할 때 재무 부담 경감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한국신용평가는 “자산 매각 등을 통한 투자 부담 완화 여부와 진행 중인 중장기 투자가 본원적 사업경쟁력 제고로 이어질 수 있을지가 모니터링 대상”이라고 했다.

‘시간’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도 문제다. 신세계그룹이 정상화를 위한 고삐를 쥔 사이 쿠팡이 과감한 투자를 단행해 시장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을 수 있다는 우려다.

한 인사조직전략 전문가는 “이번 인사로 그룹의 쇄신이 뒤따를 것은 분명하지만, 혁신으로 이어질지는 의문”이라며 “재무통 대표들이 수익 개선에만 치중해 시장 변화 대응에 소극적일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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