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은행 1만개인데…한국은 왜 ‘5대’만 고집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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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03.13. 오후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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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의 경제TalkTalk] 서정의 한국은행 국장 ①/③

한국의 은행 과점화는 국가경제에 충분한 자금을 공급하지 못하는 현상을 유발하면서 서민들을 고금리 대출로 내쫒는 요인이 되고 있다. 지난 2월 5일 서울 시내 은행 현금인출기(ATM) 모습./연합뉴스

한국은행 서정의 국장은 오랫동안 한국과 세계의 금융제도에 관해 연구한 사람이다. 그가 5년전에 쓴 책의 제목은 ‘대한민국 금융빅뱅 시나리오’였다. 책의 목차를 열어 보니, 현재의 은행 고금리 이슈를 연상시키는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제 1부, 무엇이 문제인가?…예대금리차’

‘제 2부,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은행 과점…은행 수익성의 진실게임’

책에 있는 수많은 표와 그래프들의 숫자가 현재와 시차가 있지만, 한국의 금융제도에 대한 통찰력은 살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만나 보기로 했다. 따사로운 봄 햇살과 차가운 겨울 바람이 교차하던 지난 3월 2일 오후 2시, 필자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55 한국은행 소공별관 13층 제1 세미나실에서 서 국장과 마주 앉았다.



—한은 입행 이후 주로 어떤 업무를 담당했나?

“입행 직후에는 조사제1부 금융제도과에서 우리나라 금융제도 전반에 관한 일을 다 했다. 한은법에 보면 정부에서 중요한 금융 관련 법률을 제개정 할 때에는 관계 기관이 한은 금융통화위원회에 자문해 답신을 얻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금통위에 자문이 오면 답신을 만들어 정부에 보내는 일을 많이 했다.

또 한국의 금융산업 현황과 발전 방안에 대한 분석 보고서도 많이 썼다. 미국에서 공부한 뒤에 벨기에 EU(유럽연합)대표부에 파견을 간 적이 있다. 그 때 얻었던 현장 경험과 인맥이 한국의 금융산업을 되돌아보고 개선 방안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됐다.”

32년간 금융제도 연구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연구조정역을 맡고 있다. 한국은행에서는 여러가지 연구를 많이 하는데, 연구자들이 쓴 보고서를 보고 개선점을 찾는 일을 한다.”

—금융제도를 연구한지는 얼마나 됐나?

“32년 전 한국은행 입행 이후에 줄곧 그러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를 해왔다.”

통화정책과 금융안정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은행의 서울 중구 남대문로 본관./이명원 기자

—금융제도를 독자들에게 쉽게 설명하면?

“금융제도는 금융시장, 금융기관, 금융규제로 구분된다. 이 3가지를 묶어서 금융제도라고 한다. 이 중 금융기관은 그룹 단위로 은행, 증권사, 보험회사 형태로 연구한다. 따라서 금융기관 대신 금융산업으로 볼 수도 있다.”

서 국장은 독자들이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으나,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독자들의 피부에 와닿도록 현재 이슈가 되는 은행 금리 문제에 대한 질문으로 바로 들어갔다.

‘은행 과점 폐혜’ 공론화

—현재 정부가 논의하고 있는 은행의 예대(예금과 대출)금리차 축소와 은행 산업의 개편 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대통령이 한마디 하자 금융계가 움직이고 있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문제가 공론화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최소한 이제는 우리나라 은행 산업이 과점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점만 해도 성과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금융산업의 과점이 갖는 문제점을 공론화하고 시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월 26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법무부·공정위·법제처 등에 대한 업무보고에서 발언하는 모습. /연합뉴스

—그 정도로 은행 과점에 대한 논의가 없었나?

“은행 산업의 과점화가 어떤 폐해를 갖고 오는지에 대해 수십년 동안 논의가 없었다. 아예 은행 과점은 당연한 것 같이 여기고 살아왔다. 오히려 관변 연구단체 중심으로 우리나라 은행 산업은 내부적으로 경쟁이 충분하다는 식의 보고서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행태였다. 은행 산업을 과점으로 인식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움직임이 사실상 전혀 없었다.”

만족스럽지 못한 개혁 방안

—지금 나오는 개혁 방안은 만족스러운가?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진 내용을 보면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 예를 들면, 인터넷 은행을 더 만들어야 하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진실을 왜곡하고 지엽 말단적인 이야기이다. 핀테크 기업을 대상으로 은행의 지급결제 업무를 허용해야 한다든지, 은행의 업무를 여러 개로 나눠서 다른 금융회사들이 그 중의 일부를 취급할 수 있도록 스몰 라이선스(small licence)를 시행한다든지, 다른 은행들에게 자극을 주는 챌린지 은행을 허가해야 한다는 등의 논의도 있는 것으로 들었다.

왜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인지 이해가 안된다. 핵심적인 이야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엉뚱한 이야기들이다. 전반적으로 배가 산으로 가는 것 아닌가 걱정이다.”

한국 금융산업의 감독과 제도 개편을 책임지고 있는 김주현 금융위원장. 그가 대통령의 지적 이후 금융제도 개선안을 내놓고 있으나, 문제 해결에는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1월 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2023년 업무계획 보고 사전 브리핑을 하는 모습./뉴스1

서 국장이 예리하고 비판적인 발언을 이어갔다.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동안 금융산업에서는 뭐가 터지면 땜빵식으로 처리해왔다. 대통령이 걱정할 정도로 우리 은행산업이 문제라면 지금이라도 무엇이 문제인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사안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차대한 문제인 만큼 일개 정부 부처에만 맡겨서는 안된다. 국회가 나서야 한다.”

매년 GDP 2% 정도 손실

—우리나라 금융에 어떤 문제들이 있나?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현상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금융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에도 너무나 많은 혼란이 있다. 우리 금융제도 안에 내재되어 있는 구조적 문제점들 때문이다.

이런 구조적 문제점들 때문에 국민들이 보는 피해는 최소한 연간 GDP(국내총생산)의 2%, 2022년 기준으로는 43조원 정도 될 것이라고 추정한다. 우리나라 은행 산업이 미국이나 유럽처럼 효율적으로 움직이면 GDP 성장률이 예컨대 3%에서 5%로 올라갈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경제 성장률의 하향 추세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금융산업의 비효율성을 제거하는 금융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추론하나?

서 국장이 자신의 책 25쪽을 펼쳐 그래프를 보여주며 말했다.

“2016년말 기준 명목 GDP 대비 전체 가계 부채의 비율과, 명목 GDP 대비 은행에서 받은 가계 대출 비중을 나라별로 비교해봤다.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등은 거의 대부분의 가계 부채가 은행 대출인 반면, 우리나라 가계 부채 중 은행 대출의 비중은 절반도 안된다. 집안에 돈이 필요할 때 다른 나라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은행에서 빌리지만, 우리 국민의 절반 정도는 은행 밖의 고금리 대출로 내몰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금리 대출에 시달리는 한국인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가계 대출이 은행을 넘어 저축은행, 카드론 등으로 가면 대출 금리가 확 상승하지 않나? 보험사, 증권사 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가계 부채는 저금리의 은행 대출이 절반을 밑도는 수준이고, 그 나머지는 대부분 고금리 대출이다.

우리나라 가계 부채의 GDP 대비 비중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지만, 그 구성 또한 매우 열악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저소득층으로 갈수록 빚이 빚을 부르는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도 매우 클 것이다.”

은행의 저금리 대출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서민들은 저축은행 등의 고금리 대출로 내몰리고 있다. 서울 시내 한 저축은행 영업장 모습./조선일보 DB

—은행의 저금리 대출이 많아지면 가계의 금융비용 부담이 줄어들면서 GDP 성장률이 올라갈 수 있다는 뜻인가?

“우리나라가 유럽처럼 은행 대출이 주류를 차지할 경우 절약할 수 있는 금융비용을 2018년에 추정해 본 적이 있다. 연간 20조~30조원 정도 됐다. 당시 1년 GDP(국내총생산)가 1700조원 정도였으니 1%가 훨씬 넘는 수치이다.”

저소득층 피해가 더 커

—가계의 대출이자 부담이 줄어들 때 그 감소분이 다 GDP로 연결된다고 볼 수는 없지 않나?

“고금리 대출을 쓰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저소득층이다. 이들은 버는 돈의 90% 이상을 소비로 지출한다. 따라서 이들이 이자 지출을 아끼면 그만큼 소비가 늘어나면서 GDP가 증가한다고 봐야 한다.

반면 이 돈이 금융회사로 들어가면 그 돈은 외국인 배당 형태로 해외로 유출되거나, 금융기관 내부 유보 등으로 남게 된다. 곧바로 국내소비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은행의 대출 기능이 부진한 탓에 GDP의 1% 이상이 날라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소득층은 대출 이자 부담이 줄면 그 돈을 생활비로 쓰기 때문에 같은 금액으로 고소득층보다 경제성장에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지난 2021년 6월 9일 서울 한 고용센터에 실업급여 교육을 신청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실직자들./조선일보 DB

서 국장이 이 대목에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등 뒤에 있던 화이트 보드에 ‘금리 절벽’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했다. 시작점을 중심으로 X축은 금융거래자의 신용도가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Y축은 금융거래자의 예대금리차가 작은 쪽에서 큰 쪽으로 움직였다.

서 국장은 이 좌표 위에 한국의 그래프를 1개, 미국 및 유럽 국가들의 그래프를 1개 그렸다. 미국 및 유럽 국가들의 그래프는 완만하게 우상향하는 곡선인 반면, 한국의 그래프는 미국-유럽의 그래프 윗면에 마치 계단이 한 단 높아지는 형태로 그려졌다. 금융거래자의 신용도가 낮아지는 어느 순간에 금리 부담이 갑작스레 높아지는 그 계단 부분을 서 국장은 금리 절벽이라고 불렀다.

한국과 미국-유럽 금융서비스 이용자의 금리 부담 비교. 한국은 미국-유럽보다 금리 부담이 전반적으로 높을 뿐 아니라 고신용에서 저신용으로 신용등급이 이동하는 와중에 저소득층의 금리부담이 급등하는 금리 절벽 현상이 생긴다./김기훈

서 국장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금리 절벽은 우리 금융산업의 구조적인 치부를 드러내고 있다.”

—무슨 뜻인지?

“이 그래프가 의미하는 것은 두가지이다.

첫째, 우리나라에서는 신용도가 높은 사람조차 미국이나 유럽국가들의 신용도 높은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금융비용 부담을 안고 있다.

둘째, 특히 신용도가 낮은 저소득층의 경우 예대금리차 격차로 인해 부담해야 하는 금융비용이 미국이나 유럽 국가보다 훨씬 커 큰 손해를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저소득층은 저축은행이나 신용카드 회사 같은 소위 말하는 ‘제2 금융권’에서 비싼 금리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만큼 그 손해가 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금리 절벽

—왜 이런 문제가 생기나?

“기본적으로 은행이 턱도 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부 관료 등 일부에서는 우리나라 은행의 자금공급이 수요 대비 충분하다고 주장하는데,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은행의 자금공급이 충분하면 우리나라 국민의 절반이 고금리 가계대출에 매달리고 있겠는가? 경제학의 세계적인 석학들도 국민의 자금수요 대비 은행의 자금공급이 충분하다느니 그렇지 않느니 따위의 이야기는 함부로 못한다. 그걸 사전에 어떻게 알겠는가?

더욱이 우리나라의 경우 은행들이 과점 체제에 익숙해 경쟁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금이 필요한 사람들이 싼 이자로 자금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만큼 낮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은행의 금리가 선진국 은행보다 높은 이유는 은행들이 과점으로 담합하며 금융시장에 자금을 충분히 공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지난 2월 14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에서 직원이 5만원권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뉴스1

—개인들의 이자 부담이 커지는 것 외에 다른 문제점은?

“은행들이 과점 체제 덕에 가계 대출만으로도 연간 수십조원씩 이익을 내므로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높은 기업 대출은 소홀히 하고 있다. 기업 대출은 금액도 크고 기업의 도산 위험도 있기 때문에 가계 대출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위험하다.

그런데 가계 대출만 해도 연간 수십조원씩 돈을 버는데 굳이 왜 기업 대출을 하겠나? 급할 것이 없으니 기업 대출을 하더라도 안전하게 담보를 잡고 대출해주는 손 쉬운 일만 한다.”

은행들은 과점 체제를 유지하며 가계 대출에서 큰 이익을 보고 있기 때문에 정작 자금이 필요한 중소기업에는 위험이 크다며 대출을 기피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사진은 한 중소기업 공장./조선일보 DB

—그러면 정작 돈이 필요한 중소기업과 대기업들이 손을 벌리면 누가 돈을 대출해 주나?

“주식이나 회사채 등 직접금융을 통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대개는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등 정부가 직접 소유하고 지배하는 은행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중소기업들은 직접금융시장에 접근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대기업 대출은 절반 가까이, 중소기업 대출은 30% 정도를 이러한 특수은행들이 담당한다. 민간은행들이 가계 대출에 안주하고 기업 대출을 가급적 회피하다 보니 기업 금융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져 간다.”

국책 은행의 문제점

—특수은행들의 비중이 커지면 어떤 문제가 생기나?

“민간 비즈니스에 정부의 공적인 개입이 있으면 정치적 명분 등이 득세하면서 효율성이 떨어진다. 어느 경우에나 정부가 시장원리에 의해 이윤을 추구하는 민간에 비해 효율성이 높을 수는 없다.

더군다나 정부가 암묵적으로 지급을 보증하고 있는 만큼 도덕해이(모럴 해저드)가 만연할 우려도 크다. 불과 몇 년 전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자본적정성이 크게 떨어져 정부가 세금을 헐어 이들 은행의 건전성을 보강할 수 밖에 없었던 사례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과거 한진해운 경우와 같이 산업은행 위주로 이루어지는 기업구조조정이 무리하게 추진될 우려도 적지 않다. 결국 국가경제의 전체적인 효율성, 즉 성장잠재력을 떨어뜨리게 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민간 은행이 위험이 큰 기업 대출을 기피하면서 기업 대출은 효율성이 떨어지는 국책은행들이 떠맡고 있다. 서울 여의도 KDB산업은행 본점./KDB산업은행

—은행들도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인데, 위험을 회피하고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은행들이 과점 이익을 즐기는 바람에 성장성 있는 기업을 발굴하려는 유인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금융산업은 기본적으로 리스크(불확실성)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산업이다. 은행들이 리스크를 어느 정도 감수하고 성장성 있는 기업을 발굴해야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은행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국가의 성장잠재력 확충에 기여하게 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국가경제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은행들이 지금처럼 가계 대출에 집중하고 기업 대출도 담보 대출 위주로 안전하게만 수행하면 국가의 성장잠재력 확충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행태는 우리나라의 GDP(국내총생산)를 추가적으로 1% 이상 갉아먹고 있다고 추산한다. 대출 고금리에 따른 직접적인 손실만 GDP의 1% 이상이니, 이러한 효과까지 감안하면 은행 과점으로 인한 전체 손실은 GDP 대비 2% 이상에 이를 것이다.”

은행 과점의 피해자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 보았다. 서 국장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나라 가계 부채 가운데 고금리 부채가 절반을 차지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결국 턱없이 부족한 은행이 국민경제에 필요한 자금 공급을 충분히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틈새를 파고 들어 고금리로 먹고 사는 업체들이 존속하고 있다.”

은행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대출금리가 높은 저축은행과 대부업체가 그 틈새를 파고 들어 이자 장사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2021년 8월 16일 서울 중구의 한 대부업체와 저축은행 건물 앞으로 시민이 지나고 있다./뉴스1

—은행을 더 만들면 되지 않나?

“은행이 부족하지만 새로운 은행이 생기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은행의 집중도가 높은 것을 거론한다. 소수의 은행들이 전체 은행 대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은행 수를 늘려봐야 대출 확대에 큰 효과가 없다는 뜻이다.”

—맞는 이야기인가?

“아니다. 은행산업의 집중도가 높다는 것과 은행산업이 과점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이야기이다. 은행은 원래 집중도가 높은 산업이다. 미국이나 유럽연합(EU)의 은행 수는 각각 1만개 정도 된다. 그 중에 85~90%는 소형은행이다. 대형은행은 숫자로는 1%도 안된다. 그렇지만 그 대형은행들이 전체 예금과 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 정도이다. 그러니 집중도가 매우 높다.”

금리 절벽 없애는 중소 은행들

—그러면 나머지 30% 정도의 대출 시장을 수많은 중소형 은행들이 조금씩 나눠 갖고 있나?

“그렇다. 중요한 점은 은행산업의 예대금리차를 둘러싸고 수익기회가 있으면 언제든지 새로운 소형은행이 은행산업에 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은행 간의 인수와 합병도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은행 예대금리차가 가장 효율적인 수준으로까지 좁혀지게 되고, 국민경제 전체의 금융비용 부담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한국과 달리 미국의 신용협동조합은 규모는 작지만 실질적으로 은행의 권한을 갖고 은행 기능을 하고 있다. 사진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랠리에 있는 코스트 페더럴 신용협동조합의 한 지점./핼리옷(2011년 2월 17일, 위키피디아)

서 국장이 말을 이어갔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상대적으로 대형은행에 비해 자본력과 인력 수준이 떨어지는 소형은행들이 살아남기 위해 주택담보대출 등 소규모 가계 대출로 특화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몸집이 큰 대형은행이 소규모 가계 대출에서 소형은행과 상대하기는 쉽지 않다. 소형은행은 개별 소비자의 수요에 맞춰 매우 섬세하고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설령 은행산업 집중도가 높다 하더라도 대형은행이 소규모 가계 대출을 취급하면서 가격지배력을 행사해 과점이익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은행간 경쟁으로 금리 인하

서 국장이 다시 화이트 보드의 ‘금리 절벽’ 그래프를 가리켰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가계 예대금리차 그래프가 우상향 방향으로 완만하게 올라가는 이유는 새로운 은행의 신규 진입이 매우 자유롭고 활발한 가운데 조금만 금리 마진(이익)을 볼 수 있으면 수많은 작은 은행들이 끼어들어서 예금 및 대출 금리를 둘러싸고 가격경쟁을 하기 때문이다.”

저신용자의 대출 이자가 급등하는 금리절벽 현상이 선진국에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규모가 작은 금융회사들이 은행 기능을 하면서 치열하게 경쟁해 금리를 조정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호주 남부의 한 신용협동조합인 '피플스 초이스' 홈페이지.

—우리나라는?

“1990년 이후 30여년 동안 인터넷은행이 생기기 이전까지는 신규 은행 설립이 전혀 없었다. 진입 장벽을 쳐 놓았다.”

은행 허가 기준

—미국이나 유럽의 은행 허가 기준은?

“미국이나 유럽의 은행 진입 규정을 보면 매우 투명하다. 전산 시설, 관리 인력, 최소 자본금 등 기준을 갖추면 누구나 은행업을 할 수 있다. 최소자본금 요건도 매우 낮다. 미국이나 유럽은 은행 설립할 때 최소자본금 기준이 10억~1억원 수준인 경우도 많다.

반면, 우리나라 은행의 최소자본금은 일반은행은 1000억원, 지방은행은 250억원이다. 몇십년째 이 규정이 바뀌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는 은행을 설립하기 위한 여건이 매우 엄격해 은행 과점 체제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5대 금융지주의 하나인 신한금융지주의 서울 중구 세종대로 본사./신한금융지주

—은행이 동네 구멍가게도 아닌데,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그렇게 작은 자본금을 가진 은행들도 허가를 해준다는 말인가?

“우리나라는 금융 당국이 은행 허가 때 적합 심사를 한다. 다시 말해 인가 기준이 매우 자의적이다.

그래서 금융계에서는 금융 당국에서 지난 30년 동안 새 은행 허가를 안내줬으니 앞으로도 안내줄 것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하다. 그 바람에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은행을 만든 경우는 전무하다. 이런 식으로 은행의 진입이 틀어막혀 있고 소수 은행의 집중도가 높은 상황에서는 과점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허가 기준 낮추고 투명해야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이나 유럽처럼 은행업 진입 조건이 투명하고 최소자본금 요건이 완화되면 금리절벽 현상도 사라질 것이다. 치킨집끼리 경쟁하듯이, 중소형 은행들이 지금까지 대형 은행이 집중해온 가계대출 부문에 자연스럽게 끼어 들어 돈을 벌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형 은행은 가계 대출에서 더 이상 과점이익을 누리기 불가능하게 될 것이고, 결국 소형 은행들이 위험하다고 두려워하는 기업 대출 활성화를 통해 수익 기반을 확충해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미국-유럽처럼 은행 진입 기준이 투명하고 진입 장벽이 낮으면 저소득층의 금리 부담이 줄어들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사진은 서울 명동에 위치한 하나금융지주 본사./하나금융지주

—우리나라에서도 대형 은행이 아니라 상호저축은행, 신용협동조합 등이 그러한 소형 은행의 역할을 이미 하고 있지 않나?

“앞에서 우리나라의 경우 금융에 관한 기본 개념에 너무나 많은 혼란이 있다고 말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무엇이 은행인가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상호저축은행이나 신용협동조합 등은 은행이 아니다. 은행이 아닌데다 건전성 등도 취약한 이들 금융기관이 은행과 경쟁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다. 그냥 은행이 예대금리를 조정하면 그에 맞추어 자기들도 조정할 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형은행이 예대금리차를 넓혀 수익을 내고자 할 때 반대로 예대금리차를 좁혀 시장점유율을 조금이라도 키우고자 노력하면서 대형은행을 압박하는 등의 모습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결국 미국이나 유럽처럼 대형 은행과 소형 은행 간에 예금 및 대출 금리를 둘러싸고 이뤄지는 경쟁 관계가 상호저축은행 등에 나타날 가능성은 전무하다.”

은행이란 무엇인가?

—왜 그런가?

“은행이 도대체 뭔가를 한번 생각해 보자. 현대적인 의미에서 은행은 규모에 관계 없이 3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은행으로 인정된다.

첫째, 자금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중앙은행에 접근해 가장 저렴한 기준금리에 돈을 빌릴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예금보험공사의 예금보험제도 적용을 받아 예금자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은행의 재무상태가 건전한지 판정하는 글로벌 기준인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 규제를 적용받아야 한다.

외형적인 이름이나 규모 등의 형식적인 요소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은행이든, 상호저축은행이든, 신용협동조합이든 이러한 3가지 법적인 자격 요건을 갖추고 있으면 그 금융기관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은행이다.”

금융회사의 규모가 크든 작든 실질적으로 은행 기능을 하려면 예금보험공사의 예금자 보호장치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진은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예금보험공사 본부./미국 예금보험공사

—미국이나 유럽 국가에서도 그런가?

“미국이나 유럽 국가에도 신협, 저축은행 등의 이름을 가진 금융기관이 있는데, 이들도 은행이라는 이름을 가진 금융기관과 똑같이 3가지 기준을 의무적으로 충족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영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반 국민들이 이들 금융기관을 다르게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최고 수준의 건전성 규제나 예금자 보호 등을 대형 은행과 똑같이 적용받는데, 단지 규모가 작다고 해서 소형 은행이나 신협, 저축은행 등을 열등한 금융기관으로 볼 이유는 없지 않겠나? 이 때문에 대형 은행과 소형 은행 간의 건전한 경쟁관계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미국·유럽과 큰 시각차

—우리나라는?

“은행을 바라보는 시각이 미국이나 유럽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은행은 우등한 금융기관으로, 상호저축은행, 신용협동조합, 지역협동조합 등은 고금리 대출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혹은 빈번하게 금융사고나 일으키는 열등한 금융기관으로 인식하는 현상이 팽배하다. 이런 상황에서 상호저축은행 등이 대형은행을 상대로 과점이익을 누리지 못하도록 가격경쟁을 벌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한국에는 저축은행 등 많은 소형 금융회사들이 있으나 미국-유럽과 달리 실질적인 은행 권한을 갖고 있지 못해 은행만큼 양질의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사진은 지난 2월 6일 DB저축은행 강남 금융센터 개점식./DB저축은행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상호저축은행은 미국이나 유럽의 상호저축은행과 비교해 볼 때 무엇이 다른가?

“우리나라 상호저축은행은 앞에서 언급한 3가지 은행 요건 가운데 예금보험공사의 예금자 보호 조치만 가능하다. 저금리의 중앙은행 자금을 받을 수 없으니 고금리 예금을 내놓게 된다. 예금자 보호 조치는 되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들이 고금리를 얻기 위해 예금에 가입하는 재테크 창구로 상호저축은행을 활용하고 있다.

상호저축은행 입장에서는 고금리 예금을 받아서 수익을 내야 한다. 그래서 저소득층에 더 높은 금리로 대출을 해주거나 대출 위험이 높은 부동산 개발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은행 역할 못하는 소형 금융기관

—신용협동조합이나 새마을금고, 지역단위조합은?

“3가지 조건 중 하나도 해당이 안된다. 중앙은행의 지원을 받을 수 없으니 자체적으로 중앙회를 설립해 중앙회가 중앙은행 또는 예금보험공사 역할을 제한적으로 수행한다. 그런데 대외신뢰도 측면에서 중앙회가 중앙은행이나 예금보험공사와 비교가 되나?”

—그런데도 어떻게 잘 버티고 있나?

“정부가 이들 금융기관에 예치하는 예금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세제 혜택을 주고 있는 것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에 위치한 새마을금고 중앙회 건물./새마을금고

—그렇게 보면 미국이나 유럽과 상당히 다른 것 같다.

“이러한 금융기관들은 중앙은행과 예금보험공사가 지원하는 일반 은행과 차원이 다르다. 그러다 보니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름이야 어떻든 모두 실질적인 은행들이 일반 국민들에게 저렴하고 효율적인 금융비용으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의 많은 국민들은 은행과는 거리가 먼 열등한 금융기관을 상대해야만 하는 것이다.”

서 국장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우리나라 고소득층은 은행을 제외하고 다른 금융기관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여유자금이 있을 경우 예금만 금리가 높고 예금자 보호가 되니 상호저축은행으로 간다.

반면 상호저축은행에는 신용도가 떨어지는 사람들이 대출을 받기 위해 들어온다. 연리 15~17% 또는 법정 최고금리인 연 20%에 가까운 고금리 대출을 받게 된다. 저소득층이 대부업체로 넘어가면 금리 수준이 훨씬 높아진다.”

안정성 평가 기준도 낮아

—상호저축은행도 자기자본비율 규제가 있지 않나?

“자기자본비율 기준이 있지만 우리가 만든 기준이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BIS 기준이 아니다. 그냥 열등한 금융기관이니 이 정도 수준만 충족해서 영업하라는 정책적 배려라고나 할까?

예를 들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에 은행에 대해서는 자기자본 비율을 BIS 기준에 따라 8% 이상 유지하라고 했다. 그 때 상호저축은행에 대해서는 우리가 자의적으로 정한 기준임에도 그 비율을 2% 정도만 요구했다.”

한국은 소규모 금융회사의 건전성 규제 기준이 국제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금융회사들의 감독 실무를 담당하는 서울 여의도의 금융감독원./뉴스1

—해법은?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했지만, 은행의 진입 규제를 풀어야 한다. 그러면 대형 은행과 소형 은행이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 은행 설립 기준이 투명해지고 예측가능해져야 은행업의 신규 진입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되면 금리 절벽이 있을 수 없고, 국민들의 부담도 시간이 갈수록 사라지게 될 것이다.

또 소형 은행들이 진입할수록 대형 은행들이 기업 대출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국가의 경제성장 잠재력이 높아진다. 대형 은행의 일부 업무만 분리해 신규 진입자에게 허가해 주는 것이 아니라, 대형 은행과 동등하게 모든 업무를 취급할 수 있는 허가를 소형의 신규 진입 희망자에게도 내줘야 한다. 그러면 은행들이 알아서 스스로의 전문 영역을 개척해 나가게 될 것이다.”

한국 금융산업이 미국처럼 경쟁력을 갖추려면 은행을 포함해 신규 금융회사들의 진입이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사진은 미국 금융시스템을 관리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워싱턴 D.C. 본부./위키피디아

서정의 한국은행 국장은 자신의 문제 의식과 해결책에 대해 일사천리로 설명했다. 그의 주장의 큰 줄기는 알 수 있었다. 이제 좀 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분야에 대해 질문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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