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男공무원 호흡기가 더 튼튼한가"...산불이 지핀 '젠더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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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04.08. 오전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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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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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한 지자체 문자메시지. 산불 진화현장에 여성 직원은 귀가조처하고 남성 직원만 동원했다. [사진 블라인드 캡처]
“남성 공무원 호흡기가 여성보다 더 튼튼한가.”
“여성은 왜 (진화를) 못하게 하는가.”
지난 주말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산불이 발생한 이후 갑자기 온라인 익명 커뮤니티에선 ‘젠더갈등’이 촉발됐다.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잔불 정리 등 작업을 위해 남성 공무원들만 비상근무를 소집한 일이 알려지면서다. 산불은 인력과 단비로 꺼졌지만, 피어오른 공무원 사회 내 ‘성 불평등’ 불만은 좀처럼 꺼지지 않는 모양새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북악산·인왕산, 충남 홍성과 대전 등 전국에선 30여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충남 홍성의 경우 축구장 2000개 면적보다 넓은 산림 1454ha(헥타르)가 피해를 봤고, 서울 인왕산은 축구장 20여개 면적에 달하는 15ha(헥타르)가 피해를 입었다. 각지에서 소방·군·관할구청 등 공무원들이 투입됐고, 지난 4일부터 전국적으로 내린 비 등으로 인해 산불은 완진됐다.

“남자는 공노비이고 여자는 공주님?”
불은 꺼졌지만,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나온 반응은 뜨겁다. 지난 2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 등에 올라온, 대전시 발(發) 공무원 동원 메시지가 발단이다. ‘산불현장에 비상대기 중인 여직원 및 집결 중인 여직원은 귀가해 주시기 바란다’면서 산불 비상근무자를 ‘남자 직원’으로 한정한 내용이었다. 아울러 서울 종로구가 ‘구청 남직원 전원(동제외)’을 잔불 확인 작업 소집 대상으로 안내한 문자메시지도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이를 두고 해당 지자체가 개인의 건강상태나 질병여부 등은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성별로 산불 대응 인력을 지정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블라인드 등에선 “남자 공무원은 공노비, 여자는 공주님이 된다는데 맞나”거나 “남자만 (비상소집에) 차출하는 관행을 유지하는 지자체가 많다”는 댓글들이 잇따랐다. “자꾸 왜 이런 일을 만들어서 공무원 이미지를 안 좋게 만들고, 남녀 싸움을 붙이나”는 비판 의견도 있었다.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직원들이 인왕산에서 전날 발생한 산불에 대한 불씨 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종로구=뉴스1
“산세 험해서” 진땀 흘린 지자체 해명
각 지자체는 어렵사리 산불은 껐지만, 해명에 재차 진땀을 흘렸다. 대전시 관계자는 “당시 초유의 초대형 산불이 대전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기존 진화 인력으론 역부족이었다”며 “곧 야간 상황이라 신속한 (의사)결정이 필요했고, 남 직원으로만 투입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종로구청 관계자도 “인왕산 산세가 험한 데다가 20㎏이 넘는 등짐 펌프를 진 채 삽과 곡괭이를 들고 (산을) 올라가야 했다”며 “잘못했다간 직원이 다칠 수도 있고, 불도 빨리 꺼야 했다”고 해명했다.

여성 공무원 비중 ↑…“男 불만 쌓여”
여성 지자체 공무원 비중이 늘어나는 가운데 일부 남성 공무원들은 “같은 공무원인데 왜 여성은 같은 일을 하지 않는가”라며 상대적인 소외감·박탈감을 호소한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 2021년 기준 지자체 여성 공무원은 14만5379명으로 전체(30만1930명)에서 48.1%를 차지했다. 한 30대 남성 공무원은 “이번 산불의 경우 (지자체의)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간 쌓여왔던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 같다”며 “숙직의 경우에도 아직 남성 위주로 운용되는 곳이 많다”고 전했다. 반면 여성 공무원 사이에선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을 ‘배려’랍시고 못 하게 하는 건 오히려 소외감이 들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난 2일 대전 서구 산직동과 맞닿은 충남 금산군 복수면에서 산불이 나고 있다. 연합뉴스
“성별로 가르지 말아야”…인권위도 지적
기계적 평등을 배제하고, 운용의 묘가 필요하단 분석이 나온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성 평등 감수성을 갖고, 그간 갖춰왔던 시스템에서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는 게 중요하다”며 “시대가 변화한 만큼 업무를 성별에 따라 가르지 않고 개인의 상황에 맞게 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10월 농협의 한 직원이 “남성에게 야간 숙직을 전담하게 하는 것은 성차별”이란 취지로 낸 진정을 기각하면서도 “여성을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는 성차별적 인식은 공적 영역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원리로 작동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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