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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일본서기』 계체‧흠명대에 서술된 아리사등 기사의 성격 및 백제의 주장인 ‘我久禮山戍’에 투영된 탁순국에 대한 인식과 그 의미를 살펴보는데 있다. 먼저 아리사등의 출자와 활동 무대는 안라가 아니고 탁순국임을 명확하게 한다. 다음으로는 아리사등 기사를 ‘남부가야 3국(남가라, 탁기탄, 탁순)’에 포함된 탁순국과 연관 짓고, 탁기탄(영산∼밀양)에 소재한 ‘구례산 5성’ 기사의 검토를 통해 탁순국과 백제 양국 관계의 실상을 밝혀본다. 신라는 남가라 4촌 초략에 이어 탁순국 ‘구사모라’에의 축성과 ‘5성’ 공략 등을 통해 낙동강 하류 3국에 대한 지배력을 관철시킨다. 당시 백제는 섬진강 유역의 기문‧대사 병합의 여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이 점은 흠명대 백제가 ‘무도한 신라’와 3국의 ‘신라에의 내응’을 특히 강조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리사등 기사는 신라의 3국 병합 과정에서만 보이는데, 왜 왕권과 백제 중심의 인식에 기초하여 과장 조작했다. 탁순국과 백제의 관계는 흠명대 인식이 계체대까지 소급되었다. ‘구례모라’, ‘구례산 5성’, ‘아구례산수’ 등의 해석이 관건이다. 종래 다수의 연구에서는 흠명기의 ‘아구례산수’를 근거로 ‘구례산’은 탁순국 혹은 인접한 곳에 있고, 신라에 앞서 백제가 점령했으며, 이후 신라에 빼앗겼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백제의 일방적인 주장이고, 실제 탁순국 아리사등의 근거지에 축성한 ‘구례모라’는 ‘구사모라’의 잘못이며, 축성 주체도 신라로서 남가라 4촌 초략의 연장선에 있다. 백제는 신라가 탁순국을 병합하고 ‘아구례산수’를 내쫓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흠명대 이 지역에 대한 자국의 연고권을 강조하기 위해 계체대까지 소급하여 ‘구사모라’를 ‘구례모라’로 바꾸고 축성 주체도 자국으로 조작한 것과 관련된다. 즉 백제의 일방적인 주장인 ‘아구례산수’는, 신라가 병합한 탁기탄의 ‘구례산 5성’을 빼앗고 탁순국을 회복하겠다는 강한 의지와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백제는 신라에 병합된 3국의 멸망 원인을 언급하면서 이른 시기부터 자국과 탁순국과의 관계가 깊었고, 3국 혹은 탁순국만을 특칭하여 ‘부흥’을 말하기도 한다. 흠명 당대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안라와 신라의 통계’를 경계한 것이다. 탁순국은 3국 가운데 정치적으로 백제에 가장 가까웠고, 현실적으로도 안라와 인접한 요충지였으며, 탁기탄의 ‘구례산 5성’과 함께 안라와 신라가 ‘내통’한 주요 통로였다. 계체대 탁순국의 치소인 ‘구사모라’에의 축성과 ‘5성’ 공략은 백제와는 무관하고, 오로지 신라의 남가라 4촌 초략에 이은 탁순국과 탁기탄에서의 군사 활동의 일환이다. 흠명대 백제가 안라와 ‘임나일본부’ 그리고 친신라 가야 인물을 비판한 이유는 명백하다. 즉 신라가 탁기탄의 ‘구례산 5성’을 전초 기지로 안라에 대한 강‧온 양면책을 구사하자, 안라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던 백제는 ‘구례산 5성’을 압박하여 안라와 신라의 내통 루트를 차단하고 또한 안라와 인접한 옛 탁순국의 회복도 바랐던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as follows. First, it examines Baekje’s perception and meaning of Takujunnokuni(탁순국) projected on ‘Our defender of Kuryemurye(我久禮山戍)’, which Baekje insisted on. Second, we will link Arisa and other articles to Takujunnokuni, and analyze the post-war articles on ‘Our defender of Kuryemurye’ to find out the relationship between Takujunnokuni and Baekje. Arishito(아리사등) is seen only in the process of merging the southern Gaya three countries. The investment and activity stage of Arishito is not Anra, but Takujunnokuni. The relationship between Takujunnokuni and Baekje is described retrospectively until the destruction of Keitai Ten'nō based on the recognition of Kinmei Ten'nō. Baekje claims that Silla merged Takujunnokuni and expelled a soldier of his own country of Kuryemurye(구례산). But this is to highlight its own right to the region at the present time of Kinmei Ten'nō. Such recognition is retroactive until the times of Keitai Ten'nō, replacing Kusimura(구사모라) with Kuryemura(구례모라) and manipulating the built entity into its own country. In relation to Takujunnokuni, Baekje emphasizes that the relationship has been deep since the early days. Sometimes, three countries or Takujunnokuni are called ‘revival’. It may be a cliché, but he was wary of the statistics of Anra and Silla. Takujunnokuni was the closest to Baekje politically among the three. Because of its proximity to Anra(안라), it was also a necessary military hub of reality. In addition, it was the main passage of Anra and Silla along with Tokukodon’s ‘Kuryemurye(구례산)’.